고사리역, 화려한 날은 가고...

by Henry

산 넘고 물 건너

산을 넘고 굽이굽이 고갯길이다.

한반도의 등줄기를 넘는 길이 쉬운 게 아니다.

강원도의 힘찬 등뼈 근육을 느꼈다.

산 넘고 물 건너 드디어 늑구리 마을에 도착했다.


늑구리(訥口里)는 도계읍과 4킬로미터 거리다.

앞으로는 봉황산이 솟았고,

마을 남쪽으로는 오십천이 흐른다.


원래 고사리역은 늑구리 마을에 있지 않았다.

2킬로미터 떨어진 고사리(古士里) 마을에 있었다.

일제가 처음 역사를 설치한 곳이 고사리 마을이다.

마을 이름을 따서 고사리역이라고 정했다.


늑구리 마을이 탄광과 가깝다.

석탄 수송을 편하게 하려고 역을 늑구리로 옮겼다.

역을 옮기면서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고사리에는 고사리역이 없고,

늑구리에 있는 고사리역이 있다.

일제 수탈의 아픈 상처를 지닌 사연이다.


영광의 시대는 저물고

늑구리 일대는 일제 강점기부터 석탄산지로 유명했다.

일대에는 삼마탄광, 대방탄광, 예원탄광이 있었다.

잘 나갈 때는 종업원 861명에 연간 약 20만 톤의 무연탄을 생산했다.

지금은 광산이 모두 문을 닫았다.

탄광이 사라지면서 늑구리의 전성시대도 막을 내렸다.


고사리역의 역사도 부침을 거듭했다.

1940년 7월 31일 보통 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1958년 1월 1일 역사를 신축 준공했고,

1996년 1월 1일 승차권 차내 취급 역으로 지정됐다.


그 시절 고사리역은 하루 30량씩 화물철도를 취급했다.

무궁화호 열차가 정차하는 꽤 번듯한 역이었다.

석탄 산업의 호황은 고사리역의 불을 환히 밝혔다.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라

시들지 않는 꽃은 없고, 지지 않는 권세도 없다.

석탄산업이 쇠퇴하자 고사리역의 영광도 저물었다.


2004년 9월 1일 화물 취급이 중지됐다.

2007년 6월 1일 여객 업무도 종료됐다.

2008년 12월 8일 간이역으로 격하되었다.


고사리역의 위상은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지금은 열차가 서지 않는 폐역이 되었다.

늑구리 산골 마을에 건물만 우두커니 남았다.


탄광 산업이 호황일 때 늑구리의 위세도 대단했다.

1916년 104호에 503명의 마을 인구가 살았다.

탄광이 잘 돌아가자 인구가 크게 늘었다.

1962년 늑구리 마을은 614호에 2,957명이 살았다.

강원도 첩첩산골에 이만한 사람이면 꽤 살만했다.


석탄 산업이 저물자 인구도 차츰 줄었다.

1982년에는 422호에 2,150명이 살았다.

이때만 해도 늑구리의 위세가 아직 살아 있었다.

탄광이 사라지자 사람들도 떠났다.

지금은 늑구리 마을 전체 인구가 312명에 불과하다.


고사리역 있는 곳은 작은 산골 마을로 변했다.

겨우 15 가구 남짓한 집들이 옹기종기 서있다.

고사리 역사 건너는 삼척 도계 농공단지다.

상원전기와 봉림식품 등 몇 개의 공장이 들어섰다.

이들마저 없었다면 이곳은 얼마나 쓸쓸했을까.


역사(驛舍)는 낡고 쇠락한다.

고사리역 역사는 생각보다 더 낡았다.

게다가 높다란 철망을 쳐놓았다.

역사를 제대로 불 수 없게 했다.

이럴 거면 왜 역사를 보존하는지 헷갈린다.

무려 5시간 20분이나 걸려왔는데 철망이 웬 말인가.


너무 안타깝다.

가까이 가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철로가 있어 어쩔 수 없다 해도

고사리역은 가까이 볼 수 있게 하면 좋겠다.

역사 안에 그 옛날 사진이 있으면 더 좋겠다.

그땐 그랬구나 하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철망 밖에서 사진을 찍고 역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부러 찾아오지 않는다면 사람 보기 힘든 곳이다.

흐린 날씨 탓에 풍경이 더 쓸쓸하다.

역사(驛舍)는 낡고 쇠락할 운명인 줄 안다.



철망 없을 때 옛날 고사리 역, 사진 출처 : 위키백과



철망 탓에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없다.

하는 수없이 위키백과의 옛날 사진을 이용한다.

이 당시만 해도 역무원이 근무했을 것이다.

사진 상태로 보면 건물이 꽤 양호한 상태다.


화려한 시절은 가고

역사 간판은 세월에 해져

글자 사이의 칠이 벗겨져 올라왔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건물이 낡으면 어때?

낡은 대로 품위가 있고 세월의 귀품이 있다.

역사(驛舍)의 역사(歷史)가 흐른다.


비교적 최근의 고사리역 https://zomzom.tistory.com/5808



마을에는 강원도기념물 제59호 은행나무가 있다.

높이가 20미터에다 둘레가 11.8미터나 되니 꽤 우람하다.

나이가 1,500살이니 마을의 수호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가을에 다시 오면 은행나무의 멋진 모습을 볼 수 있겠다.

속절없는 다짐을 해본다.


마침 밖으로 외출 나오신 어르신을 만났다.

나이가 얼추 80세 가까운 어르신이다.

그 옛날 고사리역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지금은 탄광도 사라지고 사람들도 떠났다고 말한다.

흘러간 세월을 아쉬워하는 애잔하고 쓸쓸한 표정이다.


첫 번째 역사 기행(驛舍紀行)을 마무리한다.

늦은 오후의 산골 마을은 고즈넉하다.

화려한 날은 가고, 긴 추억만 남았다.

찾는 이 없는 깊은 침묵 속에 쇠락하는 역사가 애처롭다.

다음에 오면 고사리역을 가까이서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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