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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독일군을 물리치기 위한 회심의 반격을 위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진행되었다. 프랑스 오마하 해변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은 극도의 긴장과 두려움에 쌓였다. 노르망디 해변을 응시하는 밀러 대위(톰 행크스)는 목숨을 건 임무를 앞에 두고 있다. 수많은 전투를 치른다고 지친 부대원들과 함께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맡은 바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전쟁은 늘 그렇듯이 그들에게 새로운 임무가 떨어졌다. 3형제가 전사하고 적진에서 실종된 유일한 생존자 막내 라이언 일병(맷 데이먼)을 구하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한 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여덟 명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1998년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줄거리다.
이건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아니고 거꾸로 소수를 위한 다수의 희생이다. 미국 정부는 4형제가 모두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부가 원망을 듣는 것만 아니라 전쟁 참여의 명분마저 잃을 지경이었다. 미 행정부는 오히려 이것을 여론을 반전시킬 명분으로 삼으려 한다.
이 사안은 미국 육군참모총장까지 보고가 된다. 미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샬까지 나서서 막내아들 라이언 일병을 구해 어머니에게 보내라고 명령한다. 이들의 경정 이면에는 8명의 희생하더라도 라이언 일병을 구하면 미국민 전체가 감동할 것이라는 생각이 숨어 있다. 행복의 크기만을 놓고 따진다면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 것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논리다.
현실에서 이해가 충돌하는 정책을 결정할 때, '대(大)를 위한 소(少)의 희생'이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기준으로 삼는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만족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공리주의(功利主義)의 철학이다. 개인의 행복을 수치로 측정할 수 있다면 합한 값이 큰 쪽으로 결정하면 된다. 문제는 개인의 행복이라는 것이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데 있다. 하는 수 없이 찬성하는 쪽이 더 많은 쪽의 이익(功利)이 더 크다는 것으로 가름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개인 행복의 크기가 다 같은 것일까? 숫자는 적지만 행복의 크기가 숫자가 많은 사람의 그것보다 큰 경우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숫자는 많지만, 주관적으로 느끼는 행복의 크기는 소수보다 작을 수도 있다. 이럴 때는 이해 충돌 문제를 단순히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나 '대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말로 해결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