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들’-1편(관능과 욕망의 미학)

【AI와 슬기로운 동거 생활】

by Henry

그림 속의 소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베르메르 작품


그녀는 누구일까? 하녀일까, 연인일까, 모델일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소녀다. 그렇지만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베일에 싸인 소녀다. 진주 귀걸이를 한 이 소녀가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 그녀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라곤 하나도 없다. 알 수 없어 신비롭고, 다가갈 수 없어 안타깝다. 그녀를 바라볼수록 호기심만 커진다.


고개를 돌려 화가를 쳐다보는 소녀의 큰 눈망울, 관능적인 선홍색 입술, 도드라지게 빛나는 얼굴, 동양의 느낌이 나는 파란색 터번에다 진주 귀걸이가 밝게 빛난다. 그녀를 제외한 모든 것은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혔다. 밝음과 어둠을 극적으로 대비한 덕분에 소녀의 모습이 더 돋보인다. 알지 못하는 것을 동경하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의도했든 안 했든 소녀의 신비주의가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낸다.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1675)의 작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이야기다. 페르메이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빛과 어둠의 대조 기법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모나리자’의 분위기와 무척 닮았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 작품을 ‘네덜란드의 모나리자’ 혹은 ‘북유럽의 모나리자’로 부른다. 국가의 보물로 삼을 정도로 그들의 자부심이 하늘을 찌른다.


소녀의 옷은 남루하다. 그런데 값비싼 진주 귀걸이를 하고 있다. 당시 부자나 상류층 사람이 아니면 갖지 못한다. 입은 옷으로 봐서는 부잣집 딸이 아니다. 오히려 하녀의 복장에 가깝다. 그렇다면 진주 목걸이는 어떻게 된 것일까? 더구나 그 비싸다는 울트라 마린(ultramarine)의 파란색 터번은 또 뭔가? 호기심인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쩌면 화가의 어린 연인이 아닐까. 그런 추측이 나올 법도 하다.


"애, 넌 이름이 뭐니?"하고 묻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글을 썼다. 그런데 왜 소녀들이냐고? 좋은 지적이다. 글에는 세 명의 소녀가 등장한다. 한 명은 페르메이르의 그림 속 소녀다. 말하자면, 오리지널이다. 또 한 명은 영화 속의 소녀다. 마지막 한 명은 AI가 그린 소녀다. AI는 소녀를 학습해 재해석한 그림을 그렸다. 이 소녀들이 얼마나 닮았는지, 또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본다.


똑똑한 AI가 그린 소녀 그림 때문에 글을 썼다. 쓰고 보니 내용이 길다. AI 이야기까지 한 번에 하면 지루하다. AI라는 말을 들으면 숨 막히는 사람이 좀 많은가. 그래서 이야기를 두 번에 걸쳐 올린다.



영화 속의 소녀

영화 속 소녀 -1.jpg 영화 속의 소녀 - 스칼렛 요한슨



미국 여성 소설가 트레이시 슈발리에(Tracy Chevalier)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주제로 소설을 썼다. 그림 속의 그녀가 페르메이르의 어린 연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든 소설이다. 소설은 두 사람의 관계를 모호하게 끌어간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림을 완성하면서 슬픈 결말을 맞는다.


나는 소설을 보지 않았다. 대신 영화를 봤다. 피터 웨버(Peter Webber)가 감독하고 콜린 퍼스(Colin Firth)와 스칼렛 요한슨(Scarlett Johansson)이 주연한 영화다. 영화를 좀 본다는 사람치고 두 사람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스칼렛 요한슨의 얼굴이 그림 속의 소녀와 많이 닮았다. 당연한 이야기를 왜? 그러니까 그녀를 주연으로 발탁했겠지.


그리트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소녀가 페르메이르의 집 하녀로 들어온다. 그녀는 청소와 빨래 같은 집안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한다. 그러다가 페르메이르의 화실 청소를 하면서 그림에 관심을 보인다. 아니, 글도 모르는 하녀가 그림을 볼 줄 안다고? 페르메이르는 속으로 놀랐다. 아, 이렇게 이야기를 전개하는구나. 내심 작가의 상상력이 부럽다.


페르메이르는 그녀의 예술적 재능을 한눈에 알아봤다. 그는 그녀에게 명암과 색채에 관해 설명한다. 그는 값비싼 광물을 이용해 염료를 만드는 법도 가르친다. 울트라 마린(ultramarine)의 파랑을 만드는 그 비싼 청금석도 등장한다. 르네상스의 화가 중 울트라 마린의 파랑을 만들다가 파산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림 속 소녀가 쓰고 있는 터번의 파랑이다.


작업하는 동안 둘은 가까워진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연인은 아니다. 주인과 하녀 사이임에도 작업실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가깝다. 사랑보다 멀지만, 우정보다는 가까운 그런 사이라고 할까. 영화를 보는 내내 중년의 화가와 아름다운 소녀의 관계가 팽팽한 긴장감을 볼러 온다. 끝내 관객의 바람을 외면하고 그들은 돌아선다.


진주 귀걸이의 비밀

평소 페르메이르의 스폰서 노릇을 하는 부자가 있다. 그리트에 관심을 가진 그는 그녀를 모델로 그린 그림을 주문한다. 장모와 아내, 자식들과 하인들을 둔 페르메이르는 늘 돈에 쪼들렸다. 페르메이르는 그리트를 음흉하게 바라보는 부자의 눈길이 싫었다. 그렇지만 형편이 궁한 그는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더구나 함께 사는 그의 장모가 더 강하게 권유했다.


페르메이르의 아내가 외출한 어느 날, 페르메이르의 장모가 자기 딸이지 페르메이르 아내의 진주 목걸이를 그리트에게 준다. 그리트의 얼굴을 돋보이게 할 심산이다. 돈을 대주는 부자의 욕망을 채워 주려한 것이다. 그때까지 귀걸이를 걸어본 적 없는 그녀다. 페르메이르가 직접 그녀의 귀를 뚫어준다. 이렇게 해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아름다운 그림이 탄생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아슬아슬하다. 열정이 폭발할 수 있었던 몇 번의 위기를 넘긴다. 페르메이르와 그리트는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도 끝내 욕망을 억누른다. 관능적인 그리트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면서도 한 번도 손을 잡지 않는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도 그들은 감정을 외면한다. 그건 어쩌면 페르메이르의 절제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억누른 관능과 욕망의 미학이라고 할까.


두 사람은 그림이 완성되는 날까지 어떤 고백이나 사랑의 밀어도 속삭이지 않는다. 단 한 번의 포옹이나 입맞춤도 없다. 그들은 끝내 욕망을 절제하고 관능을 숨긴다. 그림은 완성되었으나 사랑은 미완으로 남았다. 아, 이렇게도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구나. 소설을 그대로 영화로 옮겼다면 여류 작가의 섬세한 감성이다. 페르메이르의 화실이 등장하는 장면은 그대로가 한 편의 그림이다. 그건 감독의 아름다운 재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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