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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Oct 24. 2022

고즈넉한 사찰의 소박한 깨침

깨완수토굴의 아침

대부분 사찰이 높은 산 중턱에 위치하지만, 현불사는 왕금산 초입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다. 왕금산 자체가 그리 높지 않은 탓에 현불사의 해발 고도도 나지막하다. 그래도 앞뒤로 산이 있어 제법 깊은 산골 태가 난다. 산속의 아침은 한여름이라 해도 서늘하여 일찌감치 잠에서 깬다. 정념(正念) 방의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부지런한 햇살이 마루까지 올라왔다. 청량한 아침 공기가 거침없이 내게 안긴다.      


      

깨완수토굴


마당 앞 정원에는 풀들이 무성하다. 여름이 뜨거울수록 초록의 생기가 돈다. 이게 뭐지? 노란색 꽃봉오리가 둥근 원뿔처럼 튀어나온 꽃이 즐비하다.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오호 원뿔(圓錐) 모양의 천인국(天人菊)이라 해서 원추천인국이라는 이름의 꽃이다. 그 옆에는 보라색의 종이 주렁주렁 달린 앙증맞고 이쁜 잔대꽃이 보인다. 잔대를 꺾어다가 방에 놓으면 보랏빛이 쏟아질 것 같다.


풀밭을 이리저리 헤집어 보니 숨은 꽃들이 다소곳이 얼굴을 든다. 오호 이리 귀여울 수가 있나. 수탉 볏 모양의 파란색 꽃이 해사한 웃음을 날린다. 이름도 닭이 붙은 닭의장풀이다. 7월이 지나면 보이기 시작하는 연보라색의 벌개미취도 예쁜 자태를 자랑한다. 꽃잎이 벌판의 개미들이 무리 지은 모양이라 이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어찌 이리 이름도 잘 짓는지 신기하다. 내친김에 풀밭을 더 더듬었다. 황금색 닭(金鷄)의 벼슬을 닮은 샛노란 금계국(金鷄菊)이 세상 잘난 채 얼굴을 쳐든다.      


앞마당을 가로 질러 올라가니 오른쪽에 주지 스님이 기거하시는 건물이 나온다. 스님께서 수도에 증진하시는 요사채 ‘취정선원(翠庭禪苑)’이다. 푸른색을 뜻하는 비취색 정원으로 스님들이 불교의 선을 공부하는 도량이다. 이곳에는 몇 개의 공부방과 신도들이 공양할 수 있는 식당이 있다.


어제는 밤이 늦어 인사를 올리지 못한 주지 스님을 뵈었다. 맑은 눈동자와 인자한 얼굴의 주지 스님이 정말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 주셨다. 주지 스님과 L 교수님의 20년이 넘는 오랜 인연이 주는 살가움이라 생각하니 나는 다 된 밥에 숟다가락 하나 얻는 혜택을 누리는 셈이다. L 교수님이 쌓은 공덕이 내게 큰 혜택으로 돌아오니 감사함을 따름이다. 


소박한 산사의 풍경

“일주문도 없고, 담도 없고, 법당 벽면에는 단청도 없네.”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뿐만 아니라 법당의 현판도 보이지 않았다. 법당은 '진묘원(眞妙院)'이라는 심오한 이름을 가졌다. 그런데 굳이 현판을 걸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 주지 스님께서 꽃이든, 나무든, 심지어 법당조차 그냥 있는 그대로 두신다. 일부러 손대서 아름답게 꾸미지 않았다. 세월 가면 모두 사라질 것이라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신 것 같다.


현불사는 일주문을 세우지 않음으로써 승(僧과) 속(俗)의 경계마저 허물었다. 형식과 격식을 따지지 말고 언제든지 편안하게 붓다의 품으로 들어오라는 뜻이다. 더구나 절에는 담벼락도 없다. 황금산 기슭이 산줄기를 타고 내려와 현불사를 감싸는 것으로 담을 대신했다. 산과 절, 길과 절의 경계가 따로 없다. 담이 없어 마을을 지나 산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절 안으로 들어온다. 절을 찾는 사람이든, 산길 걷는 나그네든 누구나 편안하게  절로 들어선다.

 

현불사 본당


사찰의 본당에는 대웅전(大雄殿)이나 적광전(寂光殿) 같은 불교 경전에서 깨달음을 의미하는 이름의 현판을 붙인다. 현불사 본당을 진묘원이라 부른다. 굳이 현판을 붙이지 않는 것으로 보면 이름으로 건물의 성격을 제한하지 않으려는 뜻이라 짐작한다. 누구나 편하게 본당에 들어와 붓다의 얼굴을 보라는 것이다. 주지 스님께서는 사람을 대할 때 늘 편안하게 격식을 따지지 않으신다. 그런 주지 스님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다.


뭐니 뭐니 해도 현불사의 가장 큰 특징은 본당에 단청을 입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나무로 지은 건물은 비바람과 병충해로 인해 쉽게 손상된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나무에 형형색색의 문양을 그려 넣는다. 불교 경전의 우화를 담은 화려한 그림을 그려 넣은 단청(丹靑)이다. 현불사 본당에는 이런 단청이 없다. 단청을 입히지 않고, 나무 위에 옻칠하여 원목을 그대로 살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무가 변색하여 검은색을 띠고 있다. 

  

욕심도 욕망도 잘게 쪼개자.

‘진묘원(眞妙院)’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깨달음을 얻는 곳이다. 진공(眞空)은 진짜 진(眞)과 없을 공(空)이다. 무엇이 진짜 없단 말인가? 세상에는 변하지 않은 고정불변의 실체는 진짜 없다. 어떤 사물도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늘 변한다. 사물이 고정 불변하지 않는 존재라면, 그것은 변하고 생성한다는 것이 묘유의 의미다.

   

바위와 쇳덩이가 고정 불변하는 실체인가? 짧은 시간에는 그렇게 보이지만, 긴 시간을 두면 바위나 쇳덩이도 닳는다.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나고 변형된다. 이들도 고정 불변한 실체가 아니라 변하고 깨져 새로운 형태가 생성하고 언젠가 소멸하는 존재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은 고정 불변하지 않고, 늘 변화하고 생성하고 소멸한다. 바로 그것이 진공묘유의 세상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아 있고, 실체로 존재하는 동안에는 우리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변한다. 매일 세포가 교체되고 나이가 들면서 머리카락이 빠진다. 근육도 소실되고 몸은 변한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음을 뜻하고 언젠가는 늙고 소멸할 것이다. 우리 몸은 고정불변이 아니라 변하고 생성하고 소멸하는 진공묘유다.


현불사에는 일주문이 없고, 단청이 없고, 본당의 현판도 없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사라질 것이니 경계를 만들거나 색칠하지 않았다. ‘없으면 많고, 많으면 적다.’는 것이 고즈넉한 산사의 가르침이다. 불필요한 욕망을 줄이라는 무언의 가르침이다. 비우는 것이 깨끗한 마음을 채우는 길이고, 거꾸로 탐욕은 깨끗한 마음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한다. 그러니 욕심도 욕망도 잘게 쪼개자. 이것이 없는 것이 많은 현불사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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