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슬기로운 동거 생활】
봄날의 강물은 자애롭다.
"스님,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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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화엄사에 벚꽃이 활짝 폈다. 흐드러지게 핀 하얀 꽃잎 아래 스님께서 깊은 묵상에 잠겼다. 흙 돌담과 검푸른 기와지붕에도 하얀 꽃잎이 드리웠다. 화실에 다닌 지 2년째 되던 해에 내가 그린 그림이다. 그림 그리는 내내 스님은 무슨 생각을 하실까 궁금했다. 해마다 봄이 오면 이 그림을 뚫어지게 본다. 그때마다 스님의 생각에 관한 궁금증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봄날의 강물은 자애롭다. 한결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결이다. 예쁜 누이의 곰살맞은 웃음처럼 화사하다. 봄의 푸름이 손에 묻는다. 손을 대면 온통 초록빛으로 변할 것만 같다. 온 천지에 화려한 꽃들과 푸른 잎들이 넘실댄다. 봄은 파스텔 색조를 왈칵 쏟아내고, 봄날의 강물은 온갖 색을 담고 유유히 흐른다.
고향 마을에도 강이 흐른다. 강변에는 통나무로 지은 카페가 있다. 가끔 고향에 가면 저녁나절에 카페 2층 창가에 앉는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붉게 타는 저녁노을이 내게로 달려온다. 강가의 오리들도 붉은 노을빛 강물 속으로 부지런히 자맥질한다.
고향의 강가에는 유채 꽃밭이 즐비하다. 봄이면 노란색이 지천으로 잔치를 벌인다. 강은 노란색 유채 꽆 그림자를 안고 흐른다. 저녁노을과 노란 유채꽃 풍경이 너무 아름다운 저녁이면 궁상맞게 찔끔 눈물을 흘린다. 가는 봄날이 서러워서일까, 마음도 깊은 상념에 젖는다.
이른 봄밤에는 사방에서 사각대는 소리가 들린다. 밤새 꽃망울이 툭툭 터지는 소리다. 다음 날이면 초록 잎들 사이로 작은 꽃들이 얼굴을 빼꼼히 내민다. 봄이 오는 밤에는 아름다운 소리의 향연이 펼쳐진다. 산도, 들도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다. 그때쯤이면 거리를 지나는 여인들의 발길에는 벌써 봄소식이 묻어온다.
늦은 봄밤에는 꽃 지는 소리가 들린다. 하늘하늘 꽃잎이 떨어진다. 후드득 빗방울 내리는 날이면 꽃잎들은 장렬하게 낙화한다. 그런 밤이 지나면 거리마다 비에 젖은 꽃잎의 비애가 나뒹군다. 머뭇거리다가 떠나지 못한 봄의 잔해들이 널브러졌다. 꽃잎 떨어진 자리 눈물 고여도 다시 꽃은 핀다. 그렇지만 한 번 떠난 우리 청춘의 꽃은 다시 피지 않는다.
봄날은 간다.
시인은 늙고 병든 몸으로 마을 어귀의 곡강(曲江)으로 간다. 그는 이태백과 쌍벽을 이루는 중국 최고의 시인 두보(杜甫)다. 곡강에서 서서 꽃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曲江二首(곡강이수)'라는 두 편의 시(二首)를 지었다. 자애로운 봄날의 강가에서 느낀 삶의 처연함을 표현했다. 그중 첫 번째 나오는 시의 구절을 보자.
"一片花飛減却春(일편화비감각춘)
꽃잎 하나 날리어도 봄빛은 깎이는데
風飄萬點正愁人(풍표만점정수인)
바람이 만 개의 꽃잎을 떨구니 못내 시름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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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하나 날리어도 봄빛은 깎인다고 한다. 만 개의 꽃잎이 떨어지면 얼마나 많은 봄빛이 사라질까. 카, 기가 막힌 시상이다. 두보의 눈에는 떨어지는 꽃잎 숫자만큼 봄날이 가는 게 보였다. 그런 두보는 지는 꽃잎과 함께 스러지는 봄을 애달파했다.
"청향(淸香)은 잔에 지고, 낙홍(落紅)은 옷에 진다."
조선시대의 문인 정극인(丁克仁)이 지은 시 상춘곡(賞春曲)의 한 구절이다. 맑은 향기는 술잔에 가득 차고, 붉은 꽃잎은 옷에 떨어진다고 한다. 이 또한 얼마나 멋진 봄 예찬인가. 그 옛날 선비의 눈에 비친 감흥이 예사롭지 않다. 나도 오늘 밤은 술잔 가득 봄 향기 채우고, 옷에 떨어지는 붉은 꽃잎을 즐겨야겠다.
요즘 디지털카메라의 해상도가 너무 훌륭하다. 카메라에 찍힌 봄 풍경도 아름답다. 마치 자연을 잘라 그대로 옮겨온 듯하다. 손에 잡힐 듯 하늘거리는 꽃잎과 파란 봄 하늘은 또 어떤가. 그뿐만 아니다. AI가 그린 봄 풍경도 놓칠 수 없다. 봄날을 눈앞에 펼쳐놓았다. 하지만 느낌은 그것으로 끝이다. 봄날의 냄새를 맡을 수 없고, 봄날 강의 자애로움을 만질 수도 없다. 그저 화려하고 예쁜 풍경뿐이다.
어제는 일요일이라 늦은 봄 향기 맡으러 강가로 갔다. 손바닥 가득 청향을 담고, 옷 가득 지는 낙홍을 받았다. 가는 봄볕을 만져도 보고, 마음속에 풍성하게 담았다. 가는 봄이 아쉬워 두 팔 가득 안았다. 가지 말라고 애원했지만, 봄은 야속하게도 손길을 뿌리친다. 서둘러 먼 길 떠날 채비를 한다. 디지털 세상에서 만나는 아날로그 감성, 이만하면 아름답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