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과하지도 않은
딱 그만큼의 취흥으로 마시려 해도
채워도 채워도 술잔은 채워지지 않고
늘 허전한 건 내 마음 탓일까
지름 5cm 남짓할까?
하얀 소주잔이 그리 큰 줄 몰랐어.
무려 1만 미터가 넘는다는
마리아나 해구보다 깊고
태평양보다 넓어
얼마나 깊으면
얼마나 넓으면
온 사람의 세상을 담아도
온 사람의 인생을 담아도
여백이 남아
세상의 무게를 견디고
삶의 무게를 견디고
희미한 불빛 아래
선술집 서랍에
꼿꼿하게 자리한 술잔
어제는 딱 즐거울 만큼만
술을 마셨어.
사람이 있어 마시고
분위기가 있어 마시고
기억이 사라지지 않을 만큼만
알딸딸한 기분을 느낄 만큼만
딱 그만큼만 마셨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맑고 투명한 소주는
어찌도 그리 정확하게 사람 폐부를 찌르는지
알싸한 그 맛에 오르는 취기
과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그 분위기에 어느새 젖었어.
오늘 아침 부대끼는 몸은
지난밤의 즐거움과 맞바꾼 대가라
약간의 숙취와 피로는
당연히 치러야 할 값이겠지
가끔 사는 일이 팍팍하고
하나님도 못 피하신다는
외로움이 밀려오는 날이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분이 좋을 딱 그만큼만
한잔하면 좋겠다.
한 달에 한 번 아니 두 번
날 정해놓고 마시는 것이 아니니
달빛이 좋다거나
가을바람이 애틋하다는
핑계가 만들어지는 날도 좋아
어제 마신 취흥이 덕분에
꽤 긴 날을 외롭지 않게 버틸 거야
그러다 언젠가 약발이 떨어지면
그때 또 누군가를 벗하여
소주잔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넓은지 알아봐야지
얼마나 많은 한숨을
얼마나 많은 눈물을
채울 수 있을지 시험해 봐야지.
너무 과하지도 않은
딱 그만큼의 취흥으로 마시려 해도
채워도 채워도 술잔은 채워지지 않고
늘 허전한 건 내 마음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