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딸딸한 기분, 딱 그만큼만

by Henry

너무 과하지도 않은

딱 그만큼의 취흥으로 마시려 해도

채워도 채워도 술잔은 채워지지 않고

늘 허전한 건 내 마음 탓일까


소주잔.jpg


지름 5cm 남짓할까?

하얀 소주잔이 그리 큰 줄 몰랐어.

무려 1만 미터가 넘는다는

마리아나 해구보다 깊고

태평양보다 넓어


얼마나 깊으면

얼마나 넓으면

온 사람의 세상을 담아도

온 사람의 인생을 담아도

여백이 남아


세상의 무게를 견디고

삶의 무게를 견디고

희미한 불빛 아래

선술집 서랍에

꼿꼿하게 자리한 술잔


어제는 딱 즐거울 만큼만

술을 마셨어.

사람이 있어 마시고

분위기가 있어 마시고

기억이 사라지지 않을 만큼만

알딸딸한 기분을 느낄 만큼만

딱 그만큼만 마셨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맑고 투명한 소주는

어찌도 그리 정확하게 사람 폐부를 찌르는지

알싸한 그 맛에 오르는 취기


과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그 분위기에 어느새 젖었어.


오늘 아침 부대끼는 몸은

지난밤의 즐거움과 맞바꾼 대가라

약간의 숙취와 피로는

당연히 치러야 할 값이겠지


가끔 사는 일이 팍팍하고

하나님도 못 피하신다는

외로움이 밀려오는 날이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분이 좋을 딱 그만큼만

한잔하면 좋겠다.


한 달에 한 번 아니 두 번

날 정해놓고 마시는 것이 아니니

달빛이 좋다거나

가을바람이 애틋하다는

핑계가 만들어지는 날도 좋아


어제 마신 취흥이 덕분에

꽤 긴 날을 외롭지 않게 버틸 거야

그러다 언젠가 약발이 떨어지면

그때 또 누군가를 벗하여


소주잔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넓은지 알아봐야지

얼마나 많은 한숨을

얼마나 많은 눈물을

채울 수 있을지 시험해 봐야지.


너무 과하지도 않은

딱 그만큼의 취흥으로 마시려 해도

채워도 채워도 술잔은 채워지지 않고

늘 허전한 건 내 마음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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