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가체프가 있는 아침

by Henry


여인의 손길처럼 부드럽고

그녀의 향기처럼 감미로운

커피의 귀부인

예가체프와 함께한 아침




예가체프가 있는 아침

예가체프

에티오피아 현지 발음으로는 이르가체프

발음이야 뭐가 중요할까


작고 둥근 타원형의

푸른빛 생두를 잘 로스팅하면

달콤한 과일 맛

초콜릿의 달콤함

레드 와인의 향미가 나


우아하면서 도도하고

상냥하면서 유혹하는

아름다운 여인을 닮았다 해서

커피의 귀부인이라 불리는 예가체프


내가 사는 도시에서

대각선으로 가장 먼 곳

해운대의 바람 맛일까

광안리의 햇빛 향일까


얼마나 정성스레 로스팅했을까

메디컬 전문가의 꿈을 접고

커피의 세계로 뛰어든 청년의

맵고 달콤한 손끝이 느껴지는 맛



어제저녁 집에 들어가니

남녘의 가을바람과 함께

예가체프와 콜롬비아 후리아 슈퍼림

인기가 높다는 수제 커피까지

박스 가득 담긴 정성과 땀을 받고

기쁨에 겨워 밤늦도록 설렜어


큰 봉지의 예가체프와

작은 봉지의 콜롬비아를

5:1로 섞으면 맛이 기가 막힌다는

중요한 팁까지 받았으니

제대로 즐길 일만 남았어.


이른 아침 눈 뜨자마자

예가체프를 내리고

그치지 않는 비를 바라보며

고독을 즐기는 남자가 되어

커피 부인의 매혹에 빠졌어.


학교 오는 길

들꽃 핀 화원을 지나다

차를 세웠고

텀블러 뚜껑을 열고 커피를 마시며

창밖으로 손을 내밀고

가늘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만지니

비 오면 그렇게 아름답다는

파리의 노천카페가 부럽지 않았어



방에 들어와 한 편의 글을 올리고

짬을 내 알이 작은 예가체프와

알이 굵은 콜롬비아의 5:1 배합을

핸드드립기에 곱게 갈아

100도 채 안 되는 물로 내렸어


캬, 바로 이 맛이야

예가체프의 섬세함

콜롬비아 후리아 슈퍼림의 적당한 바디감

내가 꿈꾸던 깊은 풍미와 향긋함이

입안 가득히 퍼지니

이 시간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살다 보면 가끔 우울할 때도 있고

열정도 식고

매사가 시큰둥해질 때

그때 나를 위안해 줄 귀부인과

중후한 후리아가 있으니

당분간은 멜라토닌과 세로토닌이 요동을 쳐도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 거야


잿빛 풍경의 거리

그리스인 조르바가 아닌 나는

여전히 자유인이 되지 못한 채

서둘러 몇 군데를 방문하고

정리한 자료를 전달하고

도시의 이 끝과 저 끝을

횡단하느라 분주한 하루


간밤 쉬 잠들지 못하고

자다 깨다 잠을 설친 탓에

운전대를 잡은 채

몇 번의 깊은 하품

신호등 앞의 짧은 졸음으로

뒤차의 채근을 받고

화들짝 놀라 차를 몰았어.


낮게 드리운 잿빛 구름

잔뜩 찌푸린 민낯의 하늘

꽉 막힌 도로

엉금엉금 기어가는 차들

차창으로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

그 모습을 보면서도 느긋한 마음

느림의 미학을 아는 걸까


가을날

줄어드는 햇빛 따라

송과선(松果線)의 멜라토닌은 늘어나고

덕분에 몸은 처지고

낮은 짧고 길어지는 밤에

센티 해지는 기분


서늘한 바람은

서서히 한해를 끝으로 내몰고

성찰하는 사람들 속에서

멜랑꼴리 한 마음을 즐기니

떠남의 미학을 아는 걸까


도시는 회색의 침묵에 빠지고

거리에 내리는 비 탓일까

흔적 드문 사람들의 발길

노란 우산을 쓴 여자아이는

종종걸음으로 아파트 단지 속으로 사라지고

비를 따라 가을이 조용히 내려와


비 오는 날이면 들려오는 노랫말처럼

깨끗한 붓 하나를

아니 온갖 붓을 챙겨 나와

거리를 천연색으로 색칠하고 싶어


언젠가 나는

시간에 발목 잡히지 않고

바람에 밀리지 않고

자유인이 되어

헐헐 날아다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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