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사 넘어 백양사로 가는 가을
아직도 잊히지 않고
포도밭 사잇길의 조그만 연못
가을이면 늘 생각난다
가을 산길
가을 햇살이 고운 아침이다. 제법 쌀쌀한 날씨 탓에 옷을 단단히 여민다. 계절도 열심히 옷을 갈아입는 중이다. 은행나무 잎 끝자락에 노란색이 물들었다. 가을 햇살이 나날이 처연해지고, 바람은 더 차가워질 것이다. 은행잎들이 거리를 온통 노랗게 색칠할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그렇게 가을은 성큼성큼 갈 길을 재촉한다.
아파트 화단에 핀 코스모스를 본다. 코발트색 하늘 아래 다소곳이 피었다. 약한 바람에도 연신 가는 허리를 흔든다. 애잔함과 쓸쓸함을 전하는 가을의 전령이다. 지금은 무시로 피는 탓에 계절을 헛갈릴 때가 있다. 그렇지만 가을꽃은 역시 코스모스가 제격이다.
찬바람이 휑하고 불면 길옆 가로수들은 한 꺼풀씩 가을의 잔해를 떨굴 것이다. 가을 나무는 퀭한 얼굴과 야윈 가슴으로 시린 겨울 맞을 채비를 한다. 열정의 계절을 한참이나 뒤로 하고, 냉정의 계절을 앞에 둔 우리는 가을의 조락에 시간의 무상함을 곱씹는다.
어느 해 가을인지 지금은 기억조차 흐릿하다. 단풍 곱기로 이름난 내장산을 찾았다. 내장사와 백양사 사이의 가을 길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20년도 넘은 이야기라 그 산길이 온전히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반나절을 걸어도 사람 하나 없던 그 길 말이다.
내장산 산허리로 길이 있었다. 야트막한 야산을 돌아서니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인삼밭이 있다. 인기척 없는 한적한 들판의 갈대밭에 누워 파란 하늘을 올려봤다. 그날 그 길에는 낙엽과 갈대, 고개 숙인 벼 이삭, 웃자란 긴 수염 옥수수가 차례로 나를 반겼다. 이름 모를 들꽃들도 환한 미소로 나그네의 갈 길을 축복했다. 낭만과 고독 그리고 애수가 주렁주렁 내 가슴에 달렸다.
그 길 들판의 텃밭은 또 얼마나 풍성하던지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얀 속살 뽐내던 산비탈 밭의 무와 한껏 살이 밴 배추는 농염한 아름다움을 뽐냈다. 밭두렁에는 심은 콩들은 작은 키를 재며 제가 크다고 우기느라 바빴다. 잘 자란 콩 줄기를 불에 그슬리면 익은 콩들이 후드득 떨어질 기세다. 불타는 여름 햇볕을 이겨 낸 그들은 가을 들판을 풍요하게 그렸다. 성숙한 여인의 넉넉한 가슴처럼 풍성한 가을 들판을 걷는 황홀함이 두고 잊히지 않는다.
포도밭 사잇길
오래전 도시의 외곽에서 살 때다. 가을 아침 일찍 일어나 포도밭 사잇길을 걸었다. 집 앞쪽으로는 네모난 창에 네모난 차들이 서 있다. 집 뒤로는 수확을 끝낸 마른 잎사귀들이 달린 포도밭이 줄지어 있다. 아직 가을걷이가 끝나지 않아 논은 가을 햇살 아래 황금색으로 일렁였다.
포도밭 사이로 샛길이 나 있다. 그 길은 갈대가 우거진 저수지로 이어진다. 저수지의 성마른 물고기들이 연못 위로 튀어 오른다. 가을 햇살에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촐싹거린다. 밤샌 낚시꾼들은 숨죽인 채 물 위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방죽 위를 걷다 보면 가을 해가 떠오른다. 포도밭 너머 지평선 위로 붉은 해가 솟아오른다. 방죽 위에 웃자란 풀들이 부드러운 손길로 간지럽힌다. 건너편 논에는 부지런한 농부가 텃밭을 손보느라 부산스럽다. 그의 어깨 위로 고운 가을 햇살이 내려앉는다.
더 추워지기 전에 가을 들녘을 걷고 싶다. 걷다 지치면 퉁퉁 부은 발을 차가운 시냇물에 담글 것이다. 물살을 타고 내려오는 낙엽이 내 발에 부딪혀도 좋다. 피라미 떼 가을 햇살에 하얀 비늘 번득이는 가을 산 계곡으로 가고 싶다.
찬 바람이 불면 새들도 떠나고, 거리는 온통 회색으로 변한다. 도시의 화려한 인공의 색채를 뒤에 놓고, 가녀린 불빛 비치는 선술집을 찾을 것이다. 구석진 자리 모서리에 앉아 말라비틀어진 북어포를 안주 삼아 술을 마셔야겠다. 하얀 잔에 시린 고독을 가득 담으면 또 어떤가. 떠나는 가을을 생각하며 잔을 들어야지.
그리움은 가을의 낙엽처럼 아련하고, 기다림은 봄날의 꽃잎처럼 화사하다. 그래서 그럴까. 가을은 늘 아득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오늘 아침에는 내장산 너머의 산길과 포토밭 사잇길이 생각난다. 이런 아침은 쇼핑의 녹턴이 제맛이 난다. 아침에만 두 편을 글을 올린다. 살다 보면 감성이 넘치는 날도 있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