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이 내 길 맞나?

by Henry

이 길을 택하고 보니

저 길이 좋은 것 같은데

어느 길을 택해도

가지 않은 길을 그리워할 거야

그게 인생이니까



사는 건 길을 걷는 것이다.

사는 것은 길을 걷는 일이야.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길을 가. 그 길이 아스팔트로 덮인 매끈한 길일지, 먼지 펄펄 나는 흙길일지는 알 수 없어. 누구는 두 발로 걷고, 누구는 차를 타며 길을 나서지. 각자의 사정에 따라 다르지만, 결국 모두는 자기의 길을 걷게 되지.


나는 걷기를 좋아해. 아파트를 나서면 큰 길가로 가기보다 골목길을 택하지. 걷다 보면, 차를 타고 갈 때는 지나치기 쉬운 작은 것들을 볼 수 있어. 좁은 골목길의 낡은 집 베란다, 앙증맞은 꽃들이 피어 있는 화분, 풍성한 장미 넝쿨, 그리고 담벼락을 타고 기어오르는 담쟁이도 볼 수 있어.


연휴가 끝나는 마지막 날이야. 올해는 긴 추석을 보냈어. 밀린 자료도 정리할 요량으로 학교로 왔어. 바람도 시원하고 해서 공장이 밀집한 공단의 이면 도로를 걸었어. 긴 연휴라 주차장은 비었고, 공장 문은 굳게 닫혔어. 날도 흐리고 사방은 온통 침묵이라 낯선 풍경이 신기했어. 휴일의 느긋함과 여유로움, 그리고 도시의 내밀한 속살을 볼 수 있어 좋았어.


차를 타면 이내 오지만 걷는 길은 꽤 시간이 걸려. 사실 차를 탈 버릇하면 그걸 쉽게 끊지 못해. 그러다 보면, 가까운 거리를 갈 때도 벌써 차에 시동부터 걸어. 편리하고 빠른 데 길들면 걷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아. 걷는 건 인내가 필요하고 심심함을 견딜 수 있어야 해. 대신, 걸어야만 만날 수 있는 것들과 조우할 기회를 덤으로 얻어.


오늘은 학교 옆 성당 골목길을 지나왔어. 1960년 본당에서 분리됐으니, 63년이 되는 성당이야. 처음에는 성당 길을 지나쳤다가 다시 거꾸로 성당으로 갔어. 성당 안 잔디밭 성모님 어깨 위로 살포시 가을이 내려앉았어. 벤치 위 등나무는 가을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어.


벤치에 앉아 집에서 내려온 커피를 꺼내어 마셨지. 예가체프의 산미를 줄이고 콜롬비아 후리아의 향을 더한 커피 냄새가 조용한 경내에 퍼졌어. 커피 향에 취한 가을도 나른한 몸짓으로 내 곁에 자리했어. 사람 발자국 하나 없고, 시간마저 멈춘 성당은 깊은 묵상에 빠졌어.


걷는 길의 재미가 이런 거야. 한때 잊고 지냈던, 성당의 높은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가을꽃,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지고 만다는 나팔꽃을 보았어. 길가에 핀 달개비꽃을 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야. 아직도 무성한 초록 잎들 사이의 드문드문 노랗게 물든 잎들은 여린 팔목에 힘이 빠졌나 봐. 녀석들은 벌써 손을 놓고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어. 길을 걸으면 이 모든 것들이 보여.


인생도 '삼세판'이라면

길이란 발로 걷는 물리적 공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야. 우리의 삶도 길을 걷는 거야. 이 길이 내 길일까? 아니면 저 길이 내 것일까? 참 많이도 방황하고 번민했지. 끝내 나는 이 길을 걸어왔어. 만일, 그때 그 길을 선택했다면 지금보다 형편이 나을까? 아마 그럴 것이라며 살짝 후회하기도 하지. 그걸 누가 알겠어.


'노란 숲속에 길이 두 갈래로 있었어.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잣나무 숲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 간 데까지 바라보았다고 해. 그러다가 풀이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한 다른 길을 택했어. 어디에선가 먼 먼 훗날 한숨 쉬며 이야기하겠지. 나는 사람들이 덜 걸은 길을 택했다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일 거야.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의 주요 내용을 요약해 봤어. 시를 조금 변형했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시의 원문을 보는 것이 좋아. 시인의 눈에도 삶의 길을 선택하기는 참 어려운가 봐. 어느 길을 선택하던 후회가 없어야 하는데, 그게 생각만큼 잘 안되는 것이 인생일 거야. 오죽했으면 시인도 먼 먼 훗날 한숨 쉬며 그 길을 선택한 것을 말할 거라고 했을까.


"그 길은 네 길이 아니야. 다른 걸 생각해 봐"라고 누군가 확신 있게 조언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미리 살아본 사람이 현명하게 내 길을 인도했다면 나는 더 행복할까? 하긴, 누가 남의 인생을 조언하고, 자신 있게 길을 인도할 수 있을까. 또 그렇게 했더라도 과연 그 길이 맞았다고 확신할 수도 없어. 사는 건 늘 계획처럼 되지 않으니까 말이야.


막상 걷다 보니 온통 자갈밭이고 잡목이 우거진 험한 길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지. 넘어지고 깨지고 상처투성이지만, 그냥 걸어가지 않으면 안 돼. 길이야 되돌아갈 수 있지만, 삶의 길은 그렇게 할 수 없어. '삼세판'이라고 했던가? 인생도 '삼세판'이라면 실수할 일 없겠지.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중간에서 한 판 물리고 다른 길을 택할 수 있겠지. 그게 안 되니까 인생이고, 그래서 삶이 애달픈 거야.


오늘은 가을바람이 좋았어. 하늘은 잔뜩 흐리지만, 이 또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했어. 그래서 길을 걸었어. 사람이 걷는 길이야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어. 인생의 길은 그럴 수 없어. 그래서 더 아프고 더 애틋하고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내가 선택한 걸 이제 와 별 수 있나. 끝까지 묵묵히 걸어가 내 길로 만드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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