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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운동 무화과 Oct 30. 2022

그때의 일기들(4)

좋아하는 마음에도 여유가 필요하다

분명 휴가를 내고 정말 오랜만에 잠깐 쉬는 건데도 아무것도 재미가 없었다.


일단 날씨가 너무 안 좋았다. 말도 안 되게 추웠다.

이제 3월이면 날씨 따뜻해지겠지 라는 생각만 하며 2월을 버텨온 나로서는, 다시 기나긴 겨울을 견뎌야 한다는 것에 암담했다. 일단 패딩이 없기도 했지만, 바람이 워낙 세차게 부는 뉴욕이라 느낌상 한국의 겨울보다도 추웠다.


심적으로 아무리 휴가여도 내 마음을 휴가 모드로 돌리는 게 쉽지는 않았다.

쉬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내가 잘 못 쉬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왜냐면 딱히 불편한 게 없었으니까), 그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내가 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을 일들이 있었기에 붙잡고 있던 것도 있지만, 어딜 가서 뭘하든 회사 생각은 계속되었다. 그간 내 삶이 회사일로만 이루어져 있었는데, 아무리 새로운 장소라지만 다른 새로운 생각이 마구 헤집고 들어오진 않았다. 게다가 도시 생활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맨해튼에서의 삶은, 서울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과연 제2의 서울에서 휴식을 논하는 게 가능할까.


이렇게나 여행이 재미가 없다는 건, 어떻게 여행할지 난 이제 다 잊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예전에는 그 큰 캐리어를 들고 숙소를 3일마다 옮겨다니면서 한달 넘게 유럽 여행을 했을까?

가난하게 여행다녔던 옛날처럼 그 도신의 가장 저렴한 다인용 호스텔도 아닌, 나만의 공간이 보장된 에어비앤비에서 생활하는 데도 모든 게 불만스러울까.

불편함을 기본셋으로 잡아야하는 게 여행일 테다.

모든 게 내가 향유하던 방식과 다르기 때문에 이질적이고 어색하겠지만, 그게 동시에 여행이 주는 새로움일 것이다. 너무 오랜 만에 우리나라를 벗어나서인지, 이제는 익숙한 삶이 마냥 편한 나이가 된 건지 불편함이 유독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젊은이의 활기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일주일 쯤 지났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내가 다른 곳에 와 있다는 걸 조금은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휴가가 끝날 쯤이 되어서야 뉴욕 생활의 즐거움을 조금씩 음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날씨가 조금 풀린 탓도 있겠지만, 심적으로 조금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일단 새벽녘에도 긴장감에 깨는 일이 사라졌고, 배를 채우기 위해 아무거나 먹기 보다는 이왕이면 맛있는 음식들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들어간 서점에서 발견한 게 이 책이었다.

“How to travel”

“여행”이라는 단어가 상상하게 만드는 많은 아름다운 형용사들이 있지만, 실제 여행은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다는 것에 극히 공감했다. 곧 쉽사리 지루해지며, 외로움과 견뎌야 되고, 생각보다 별 거 없게 된다는 것.

어쩌면 여행에서 우리가 얻으려고 하는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는 것.

모든 비극은 홀로 고독을 견디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라나.


그리고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는 훨씬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 같다(아마도?).

조금은 회사와 나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과몰입을 덜하게 되었다랄까.

그렇다고 일을 덜한 것은 아니었다. 회사에 따로 가질 않다보니 호텔에서도 잠자기 직전까지 일하기만을 반복하면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보기 싫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얼쩡거리지 않는다는 점, 단순히 내 일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 긍정적이었다. 나를 그동안 화나게 했던 회사내 권력이나 정보 우위에 대해 (부득이하게) 손을 놓아 버리니, 그냥 마음을 놓게 되었다.

이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정신 건강에 좋은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이곳에 있는 동안 자연히 치유된 건 아니다.

다만 떨어져 있으면서, 연인끼리 서로 생각할 시간을 가져보는 것처럼, 열기를 식히고 다소간 쿨한 상태에서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일단은 업무에 집중했다. 내 팀을 새로 꾸린다는 것에 묘한 설렘이 있었다.

많이 걱정하긴 했지만, 다행히 업무는 만족스러운 성과를 내어,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

상황을 조금은 차분하게 보는 와중에, 비슷한 방식으로 나를 계속 함부로 대하는 태도를 관찰하게 된다.

생각이 명료하게 정리되는 것 같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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