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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운동 무화과 Oct 30. 2022

그때의 편지들

마음의 갈피를 못 잡는 나를 잡아준 건 내 사람들이었다

안녕!


비행기 안에서 편지 쓰는 중! 엄청 오래 온 것 같은데 아직 7시간이 남았어. 그 말은 아직 반도 안 왔다는 말이겠지?! 아니, 써놓고 나니까 충격적이네ㅋㅋㅋㅋ

밥 먹고 잠 엄청 오래 자고 양치질하고 방금 간식으로 바나나도 받았는데, 아직도 시간이 그렇게나 많이 남았다니!

그리고 그 사이에 너가 준 편지도 읽고, 질질 짜고, 생각 정리하는 글도 썼단 말이지.


뭐 한편으로 생각하면 내가 아까 말한 것처럼 마음을 추스르는 13시간의 비행이 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기도 해.

역시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 된다고,, 자꾸 울컥울컥하고 눈물이 나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 그래서 내린 결론은 어쩌면 난 그간의 일들을 겪으면서 내가 하는 모든 일에 확신이 없어진 것 같다는 것.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잘 하고 있는 건지 계속 검열하게 되고, 다른 팀원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눈치 보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더 위축되어서 원래 내가 잘하던 것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최근 점심에 집에 와서 펑펑 운 날, 그날 뭔가 나를 지탱하고 있던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아. 그래서 이번에 가게 되는 출장에서도 내가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해 스스로 압박감을 엄청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 이게 그 흐름을 잘 타면 마냥 즐거울 수도 있는 일일 텐데, 난 계속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느낌이야. 내가 돌아갈 때에는 어떤 모습일지 잘 그려지지도 않는다.




안 되면 때려치우면 된다, 라고 백 번 외치더라도, 마음이 마냥 가벼워지진 않는 것 같아.

그간은 나를 잘못 평가하고 있는 거다, 라고 생각했다면, 이번 일로는 내가 진짜 단단히 못한다는 걸 보여주는 건 아닐까 걱정돼. 회사를 나가더라도 난 멋있게 내가 잘 하는 거 보고 나오고 싶지, 이렇게 이상한 꼴로 나가고 싶진 않았거든.

그리고 신기하게도 2주 전까지는 이 정도 목표치는 금방 채우고 기세등등해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왜인지 모르게 자꾸 조그만해져. 같이 가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 사람이 나를 ㅈ밥으로 보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렵다는 생각도 들어. 왜 이런 애가 내 상사로 있는 거지? 라고 생각할 것 같고, 그냥 난 멍청하게 어버버하고 있을까봐. 이게 진짜 내 속마음인 것 같다. 내가 그렇게 일을 못하는 사람인가, 내가 그렇게 무능한가 를 자꾸 곱씹게 돼.


휴. 너한테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았는데, 가는 날까지 눈물 보이고 이렇게 우울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 그래도 괜찮아. 너무 걱정하진 마. 눈물 질질 짜고 울고 나니까 좀 마음이 괜찮아진 것 같거든ㅋㅋㅋㅋㅎㅎ


생각보다 비행기에서 사육을 하지 않아서 좀 실망스러워.. 아까 아침밥도 생각보다 양이 적어서 놀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너무 배고프네. 비행기에서도 손님들이 없으니까 긴축 재정하는 건가.. 흠..

어차피 자주 연락할 수 있으니까 엄청 떨어져 있다는 느낌은 생각보다 안 날 수도 있지 않으려나 싶은데, 어쨌든 잘 지내고 있을게!마음 잘 챙기고 건강하게 지내고 있어야지!!


아, 그리고 나도 이번에 한편으로는 회사 생활이 마냥 쉽진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 생활이 안정적이고 좋아서 더 떠나기 싫었던 것도 있는 것 같아. 그냥 나 혼자 살고 있었으면 그냥 미련없이 한국 떠났을 텐데, 우리 같이 있는 한국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가는 느낌이라서 더 슬펐어. 힘든 일 있으면 네 체온에 기댈 수도 있고, 기분 전환하러 산책도 나가고, 우울할 때면 술도 같이 먹고, 주말이면 여기저기 쏘다니는 생활이 나도  좋았으니까. 생각보다 모르는 사이에 많이 의지하고 있었던 것 같아. 너가 말한 것처럼 스며드는 게 이래서 무서운 건가ㅋㅋㅋ

그래서 이제 날씨도 풀리고 더 열심히 밖에 나돌아다닐 수 있는데, 이런 안정감을 버려두고 한치 앞도 안 보이는 곳에 혼자 내동댕이 쳐지는 기분이라서 더 슬펐을 지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도 아닌데, 참 이런 기분이 드는 게 웃기지. 한 달 이상 해외 가는 게 처음인 것도 아닌데 말이야.




나이가 들수록 용기가 없어진다는 게 이런 걸까? 나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 나는 이런 걸 무서워하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정말 많이 들어.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기회라면 기회겠지만, 이렇게까지 깨달아야되나 싶다ㅋㅋ 해외에서 살고 싶다고 자주 말하긴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나 봐. 


그리고 너가 요새 신경 날카로운 게 내 출국 때문인지 너가 저번에 말해서 알았어ㅋㅋㅋ 그 정도로 신경 쓰고 있을 줄 몰랐어. 워낙 무던하게 지내는 편이니까 그냥 적당히 질투하고 아쉬워한다고 생각했지. 이렇게 네 성격이 예민해질 정도의 문제인지는 몰랐다. 몰라줘서 미안ㅋㅋㅎㅎ 나도 혼자 낯선 이국 땅에 가고 싶지 않다고. 따라오지 그랬어? ㅎㅎ

그리고 매번 제멋대로인 나한테 다 맞춰줘서 너무 고마워. 나도 이게 맞나? 이래도 되나? 싶지만 일단 고마워하고 있어ㅋㅋㅋㅋㅋㅋ헷^^


그럼 이만 건강 조심하고 잘 지내!

바로 카톡할게!! 안녕!


- 미리 편지 안 써준 걸 사죄하며, 비행기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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