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일을 다시 시작했다. 이젠 아무거나 붙잡고 희망이라고 우기지 않아도 스스로 희망을 찾아낸다. 내 직업은 영어 강사. 20대 땐 저녁노을을 볼 수 없는 직업이라며 불평불만만 늘어놓았지만 지금은 이 일이 좋다. 일을 할 수 있는 것 자체에 감사하다. 쉬는 동안 희망 공부를 한 덕분이다.
저번주에 아이들 시험이 끝났다. 한 아이가 감기에 걸려 시험을 잘 못 봤다며 계속 불평불만과 좌절을 늘어놓았다. 그 아이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었다. 하루 1센티 나아가는 힘.
나도 학생 땐 시험이 전부인 줄 알았다. 내 학창 시절을 되돌아봐도 시험 점수가 낮아지면 내 자존감도 같이 낮아졌던 기억뿐이다. 나는 재수를 했는데, 수능 점수표를 받으러 고등학교에 찾아간 날 내 이름과 똑같은 친구의 점수가 정말 좋게 나왔다. 그걸 내 점수인 줄 알고 주시던 선생님의 표정, 그런데 내 점수가 아닌 걸 알고 실망하시던 그 표정 모두 내겐 큰 상처였다.
뭐 이전에도 공부를 못한다고 차별하던 선생님들을 숱하게 거쳐왔다. 그게 한이 맺혀, 대학에 가서 편입에 도전했다. 처음엔 호기롭게 잘 나가다가 뒷심이 없어 계속 불안해하며 방황했고, 희망을 붙잡는 힘이 없어 상위 점수를 받아도 유지하질 못했다. 이때부터 우울증을 심하게 겪었고 공부를 관두었다.
운이 좋게도 이런 내 옆에는 끈기 있는 좋은 동생들이 있었다. 그들이 나를 붙잡아 줬다. '언니, 시험이라도 봐봐요! 그동안 열심히 공부했잖아요' 이 친구들 덕분에 나는 원하던 대학 중 한 곳에 붙었고 졸업도 할 수 있었다.
시험은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라는 교훈을 이때 얻었다. 그런데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정신은 빠져있었다. 바로 희망을 붙잡는 힘.
희망을 붙잡는 힘을 배우지 못한 탓에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에 나와 더 큰 방황을 했다. 삶을 포기하려 했던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그런 20대를 거쳐 30대 중반을 바라보는나는 현재 행복하다. 앞으로도 행복할 거란 확신이 있다. 능력이 좋은 것도, 똑똑한 것도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지만, 나는 만족하는 법을 배웠고, 나를 믿어주는 힘이 생겼고, 확신에 가득 차 있고, 당당하다. 이런 내가 될 수 있게 도와준 내 삶의 가장 큰 정신은나의 희망' 하루 1센티 성장하기'다.
학교를 벗어나 성인의 삶을 시작하면 이전에 맛본 적 없는 자유라는 녀석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불안했다. 정해진 것이 없으니 너무 불안했다. 그래서 너무 먼 인생까지 계획하려 했다. 모든 것을 내 통제하에 두려고 했다. 나는 신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불안했다. 끝이 없는 터널을 계속 달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안할수록 먼 미래까지 더 세세한 계획으로 꽉꽉 채웠다.
그럴수록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멋진 자유라는 이름은 나에게 불안을 가져다줬다. 그 불안 때문에 열심히 살았고 좋은 결과를 맛본 적도 있지만 이것이 지속되자 내 정신은 온전치 못한 상태를 거쳤다. 이 과정을 이겨내려고 더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졌다.
비참한 삶을 이어가던 도중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왔다. 30대 초반에 자의 반 타의 반 백수가 됐다. 그때부터 불안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고 '세이노의 가르침'에서 나를 구해준 메시지를 마주했다. 먼 미래를 계획하느라 힘 빼지 말고 6개월에서 1년 단위의 계획만 하라는 이야기였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먼 미래를 계획하는 걸 포기했다. 그리고 내가 실패하기 어려운 계획과 약간 도전적인 계획을 섞어 24년 1월 1일 블로그 이웃에게 새해 목표를 선언했다.
먼 미래를 계획하는 걸 포기하고 마음을 비운 덕에 나는 하루 1센티 성장이라는 내 삶의 정신을 정할 수 있었다. 포기라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꿈을 바라보면 너무 멀고 커 보이지만 오늘 하루 1센티는 가깝게 느껴진다. 오늘 하루 어제 보다 성장했다면 나는 나를 기특하게 생각하고 자랑스러워하고 아껴줄 수 있다. 1센티 성장은 영어단어 하나만 외워도 이뤄지니까. 식은 죽 먹기다.
24년 이렇게 식은 죽 먹기인 하루 1센티 성장만 바라보며 달려왔다. 지나고 보니 새해 목표를 1개 빼고 다 이뤘다. 이것도 내년 초반이면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초과 달성도 했다. 커다란 목표와 계획에 치여 하나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던 20대 중후반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 아주 만족스럽다. 비교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에게만 적용하다 보니 남들이 아무리 잘났다고 외쳐도 나는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하루 1센티 성장에만 집착했기 때문이다.
하루 1센티 성장만 바라본다는 건 마음을 비운다는 이야기다. 나는 참 욕심도 많고 불안한 것도 많은 사람이었지만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젠 안다. 내 모든 욕심과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건 오늘 하루 1센티 더 집중하며 살고 오늘 하루 해낸 결과가 크지 않더라고 어제 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면 나를 승자로 생각하는 이 기쁨이 내 자신감이 되고 당당함이 되어주며 나를 더 큰 기회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이를 평생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적는다.
행복을 위한 시간
<개미>와 <뇌>를 쓴 프랑스 유명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말한다.
"가장 똑똑한 뇌는 지금 현재 여기서 만족하는 뇌다."
행복을 위한 시간은 바로 지금이며 행복을 위한 장소는 바로 여기라는 얘기다.
J. 모리스의 <잠깐만요>에는 갠지스 강변에 살았던 어부, '살림'에 대한 전설이 실려 있다.
어느 날 밤, 살림은 고된 일과를 마치고 눈을 반쯤 감은 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기가 부자가 된다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작은 돌처럼 느껴지는 것들로 가득 찬 가죽주머니가 그의 발에 차였다. 그는 그 주머니를 주워 그 속에 든 돌을 물속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돌을 던졌다.
"부자가 되면 난 큰 집에서 살 거야."
그는 또 하나의 돌을 던지며 속으로 말했다.
"하인들을 고용하고 기름진 음식을 먹을 거야."
마지막 한 개의 돌이 남을 때까지 그는 계속해서 던졌다. 살림이 마지막 돌을 손에 쥐고 들어 올리자 돌이 광선을 받아 번쩍였다. 그때 그는 그 돌들이 귀중한 보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어부는 가상의 부에 대한 헛된 꿈을 꾸고 있는 동안 손에 쥐고 있던 진짜 '부'를 내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는 이미 우리 손안에 가지고 있다.
시인 정현종은 행복을 놓치고 아쉬운 마음을 이렇게 읊었다.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행복한 사람은 '미래'를 위해 살지 않는다. '지금'이 바로 행복의 순간이다. '여기'가 바로 행복의 장소다. '지금 여기'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의미한다. 매일매일 경험하는 평범한 것, 일상적인 것들이 행복의 계시다. 걸레질을 하는 그 순간, 설거지를 하는 그 순간, 빨래를 하는 그 순간이 당신을 위한 행복의 순간이다. 그것을 지겹게 생각하고 대충 끝내고 다른 즐거움을 좇겠다고 하면 그 즐거움은 파랑새처럼 영원히 붙잡을 수 없다.
잊지 말자. 당신의 '오늘'은 당신이 살아온 과거의 총결산이며 당신이 맞이할 미래의 담보다. 당신이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사느냐가 당신의 과거와 미래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