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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럭키걸 Dec 04. 2024

낙심죄

작은 희망 불씨가 모이면 큰 희망이 된다.  

어젯밤에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어이가 없었다. 이게 현실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이 와중에 블로그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중 블로그가 폭파될 수도 있다며 마지막인사를 하던 사람이 기억에 남았다. 이 위기에서 바로 낙심해 버린 것이다. 나 또한 이 상황이 너무 화가 나서 안 쓰던 욕이 입에서 한 번 터져 나왔다. 안 쓰다가 쓰려니 하도 어색했다. 안 내던 화를 내려니 너무 어색했다. 그 정도로 이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이렇게 화만내고 욕을 한다고 해서 변하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 사람처럼 나도 낙심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계속 낙심하면 나는 과거로 돌아간다. 과거에 나는 어둠 속에 허우적 대다 이 세상에 희망이 없다며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던 사람이었다. 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저 사람처럼 낙심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래 지금 당장 무엇을 희망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희망이라는 단어라도 붙잡고 계속 되뇌자. 분명히 희망이 있을 것이다. 기도하자. 기도하자. 서울에 살지 않아 당장 뛰어갈 수 없으니 기도라도 하자. 기도가 가장 세다고 믿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신께 맡기자. 이것이 나의 최선이다."

 

나는 신에게 모든 걸 맡기려고 노력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수많은 시민들이 국회에 가있었다. 정말 자랑스러웠다.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다니 가슴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정말 감사했고, 희망이 잘 보이지 않아 희망이라는 단어를 계속 되뇌었는데, 우리 국민분들이 내게 희망이 되어주셨다. 희망이 당장 보이지 않아도 희망을 붙잡고 버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을 붙잡으면 나는 단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었다. 그걸 알기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에도 좌절에서 빨리 벗어나 희망을 붙잡을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모든 걸 포기하고 그 사람처럼 낙심하는 글을 퍼트렸다면 어땠을까.



<법점에 서야 할 사람들>

영국과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 이주민들 사이에 벌어진 보어전쟁이 한창일 때, 남아프리카의 한 병사가 기소되었다. 그의 죄명은 낙심죄!


그는 마을을 방어 중이던 병사들의 대열을 돌아다니며 온갖 부정적인 정보와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았다. 영국군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들의 공격을 막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등을 떠들어대며 자기들 마을은 함락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 것! 그는 총 하나 사용하지 않고 자기 진영을 공격한 것이다.


낙심을 부추긴 그의 말은 총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가진 무기였다.

남 얘기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낙심죄로 법정에 서야 할 사람이 많다.

"아이고 죽겠어, 아이고 죽겠어"하는 사람들, 전향적으로 탈옥을 음모해 볼 일이다.


_희망의 귀환, 차동엽 지음



우리 국민들을 보며 나는 뜨거운 감정을 느꼈다. 군인과 경찰이 대치해 있는 그곳에 찾아간 우리 국민들, 자신의 목숨에 위협에 처해질 수도 있는 그곳에 간 시민분들을 보며 나는 뜨거운 희망을 보았다.


"그래, 우리나라에 이 분들이 계셨지.

그래, 작은 불씨 같은 나도 희망이고, 너도 희망이다."


살아있는 한 이 상황을 그대로 두고 보지만은 않겠다. 피의 역사로 일궈온 민주주의다. 선조들이 피로 일궈놓은 대한민국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 나 또한 그 정신을 잊지 않겠다.


어둠 속에도 희망을 보자. 희망이 안 보이면 희망이라는 단어를 우리 머리에 되네이자. 희망이라는 단어를 붙잡고 버텨내자. 희망을 붙들면 희망이 온다는 것을 이미 우리 역사에서 여러 번 증명하고 있다. 더 이상 어리광 피우느라 좌절과 놀아나지 않겠다. 이번 위기로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을 거치지 않고 바로 희망을 붙잡아야 겠다는 확신이 가슴 깊은 곳에서 뜨겁게 올라왔다.


우리 한 명 한 명의 힘을 결코 작지 않다.

작은 불씨가 모여 불씨가 된다.

절망의 불씨를 만들지, 희망의 불씨를 만들지.

그건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어차피 희망으로 돌아올 거라면 처음부터 희망을 붙잡는 사람이 되겠다.



<작은 불씨 한 점>


요즘은 어떨까 싶지만, 우리 시대에는 캠프파이어가 최고의 낭만이었다.

어느 여름 방학, 야영 숙소 마당에서 거창하게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멋을 더하기 위해 마땅한 솜뭉치 글씨를 준비해야 했다. 한참 고심하던 중 떠오른 글귀!


'작은 불씨 한 점'


그날 불길은 한껏 사위었다. 그런데, 그날의 이벤트는 말 그대로 내 가슴속에 '작은 불씨 한 점'을 점화하였다.

이후 나는 무슨 일을 시작하든지 '작은 불씨 한 점'의 원리로 출발한다. 결과는 늘 장하고, 놀랍고, 무서웠다.


절망 한 점도 일단 점화되면, 삽시간에 주위를 암흑으로 물들인다.

희망 역시 한 점 불씨만 있으면, 온 세상으로 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나는 언젠가 이 번짐의 법칙을 황홀하게 관조하다가 시 한 점에 봉인해 두었다.


점,

한 점,

창호지에 먹물 한 점,

쫘-아-악.


씨,

씨알,

황무지에 씨알 하나,

쑤-우-욱.


절망도 쫘-아-악.

희망도 쑤-우-욱.


절망이건 희망이건 이렇게 기세 좋게 번지다가 일정량에 이르게 되면, 그땐 삽시간에 보편 현상이 된다.


어떻게?


미국의 라이얼 왓슨에 의해 이름 붙여진 100마리째 원숭이 현상(the Hundred Monkey Phenomenon)이 가져온 파급력 때문이다.


1953년 일본 미야자키현의 고지마 섬에서, 원숭이들에게 고구마를 씻어먹는 법을 가르쳤더니, 100마리째를 넘게 되자 전혀 왕래가 없던 다른 섬의 원숭이들도 저절로 씻어먹을 줄 알게 되더라는 불가사의한 현상. 1994년 인정받은 이 학설이 시사하는 바는 무섭다. 어떤 행위를 하는 개체의 수가 일정량(Critical Number)에 달하면 그 행동은 그 집단에만 국한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확산된다고 하니 말이다.


고로 자칫하면 작은 불씨 한 점이 절망의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히 절망일 수 없다.

그 치유책 또한 겨우 작은 불씨 한 점이기 까닭에.


_희망의 귀환, 차동엽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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