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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라이프 Apr 25. 2020

Alaine은 영어를 가르치고,
나는 사랑을 배운다.

마음을 나누어 주던 영어수업

      못 알아듣는 영어를 아는 척하며 실수를 몇 번 저지르다 보니 좀 더 적극적으로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료로 외국인 영어를 일대일로 지도해 주는 봉사 프로그램에  연락을 했고  Alaine이라는 백인 할머니와 매칭이 되었다. 70대 후반의 할머니와 일주일에 한 번씩 도서관에서 만나 영어로 이야기를 하며 지도받는 일, 항상 힘들어 보이셔서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나의 영어를 차근차근 잘 경청해 주시고 가르쳐 주셨다. 

 참 감사한 것은 학구적인 분이셔서 폭넓은 주제들, 즉 한국과 중국, 일본과의 국제적 관계는 어떤지, 한국 가정 내 부부의 위상 등 꽤 진지한 주제들도 많이 다루어 주셨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영재교육을 대학원에서 전공하시고 남편은 수학자였는데 책을 정말로 사랑하는 분이셨다. 나를 만나는 날이면 항상 가방 가득 대출한 책을 들고 나오셔서 반납하시곤 하셨다. 



      New Yorker라는 잡지에 나온 한국 관련기사, 언어 습득과 관련된 기사는 어김없이 스크랩을 해오시거나 잡지를 가져다주셨고, 소설가 한 강의 < The Vegetarian >을 읽고 있다며 한 강에 대해 소개한 기사도 가져오셔서 깜짝 놀랐다.

  몇 달을 공짜로 배우다 보니 늘 미안한 마음에 50불짜리 키프트 카드를 선물로 드렸다. 너무나 약소했지만 부담감 느끼시지 말라고 드렸는데, 우리 둘의 이름으로 FoodBank( 저소득층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는 자선단체)에 기부하셨다고 한다. 서로 공유하는 경험의 가치를 소중히 생각하시는 분에게 정량적으로 채무를 계산한 것 같은 죄스러움이 느껴졌다. 물론, 터무니없는 계산법이기도 하지만.




    여러 달이 지나고 이제 영어 책을 같이 읽어 보자고, 책을 한 권 골라 오셨다. 

 버락 오바마의 자서전이었는데, 대필작가가 아닌 직접 쓴 책이라 내용이 더 좋다고 추천하셨다. 난 맨 먼저 내용보다 활자크기와 두께에 관심이 갔다. 허걱. 몇 주를 같이 읽어 나가다가 분명히 감동적인 내용이라는 건 알겠지만 어려워서  좀 쉬운 책으로 바꾸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 Glitter and Glue"라는 다소 얇고 편한 내용의 책, 내 기준에 딱 맞는 책으로 바꾸고 서로 재밌게 읽고 있을 때였다. 


   매년 National Kidney Foundation에 기부를 하신다는 Alaine 할머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자선 디너에 다녀오셨다고 한다. 매년 다섯 명의 작가를 초청강사로 초빙하여 강의도 듣는다고 하셨다.  그러더니, 불쑥 책을 내미셨다. 바로 우리가 읽던 책 " Glitter and Glue"의 저자 싸인북이었다. 내가 매일 반납했다 대출했다를 반복하는 모습이 안쓰러우셨나 보다. 정말 5명의 작가들 중에 그 책의 저자가 끼어 있다는 것도 신기했고 지인에게 부탁하여 내 이름이 적힌 사인북을 가져오신 것도 그 조용한 성품에 안 어울리는 것처럼 여겨졌다.

    매 번 만나서 하는 얘기는 책 얘기도 있지만 세상 사는 얘기, 정치얘기, 아이들 키우는 얘기, 남편 얘기 등 많은 위로와 상담으로 그 시간을 행복하게 보냈던 것 같다. 문화의 차이는 있지만 사랑은 하나의 언어이고 하나의 소리였으니까.




      특히, Alaine 할머니의 딸은 제도권 교육에서 잘 자라서 스탠퍼드를 나오고 잘 살지만,  아들은 고등학교를 12학년까지 다 다니고도 체육수업 한 과목을 안 듣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결국 졸업을 못 하고 다시 GED( 미국 검정고시)를 보고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얻었다고 할 정도로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였다고 한다.  지금은 음악을 하고 직장을 다니다 집안일을 하는 남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 모습에 크게 상심하지도 않고 사회적으로 다 성취한 듯한 딸의 가정을 보면서도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또한, 어느 날 손주들이 몇 명이냐고 물으니  5.5명이라고 대답하신다. 어떻게 소수점이 나오냐고 물으니까 아들이 며느리의 동의 아래 옆집 동성애 부부에게 정자를 기증했다고 하셨다.  나로서는 아직 그 정도로 유연한 사고를 갖고 있지 못 하지만, 연세에 비해 열려 있고 삶의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시는 듯했다. 자녀들을 자신의 욕심으로 길러내지도 않았고,  남의 시선을 그다지 의식하지도 않고 산다.  아이들 걱정하는 나를 보며, 엄마의 job이 바로 아이들 걱정하는 거니까 너무 자연스러운 거라며 다독이셨다.




    Alaine 할머니는 어느 날 나를 집으로 초대해 주셨다. 남편과 함께 아트센터 수업에서 만든 서로의 두상 테라코타 작품을 보여 주며 거기에 얽힌 얘기도 해 주시고 두 분이 만나서 결혼한 얘기도 해 주셨다.  중국의 시골장터에서 찍은 사진들로 벽을 장식한 곳도 있었다. 그 작품 사진 중에는 옛날 어릴 적 김장철에 보곤 하던 빨간색 고무대야들을 찍은 작품 사진이 있어서 살짝 반갑기도 했다. 남편이 70대 중반인데 피아노와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얘기, 남편의 피아노 클래스 연주회에 갔더니 90세 할아버지가 생애 첫 연주를 했다는 얘기 등 신기하고 재미있는 얘기들로 점심만큼 맛있는 대화를 나누고 왔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틀린 영어로 말해도 오해 안 하실 거라는 믿음이 생기니 마음이 편해지고, 걱정해주고 보살펴 주는 모습에서 사랑을 느꼈다. 그런 Alaine 할머니와의 수업은 몇 년 후 Los Gatos로 이사 가시면서 끝이 났지만, 난 내게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 주셨던 할머니처럼 무료로 Korean Class를 만들어 미국 어른들을 상대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내게 영어라는 도구로 사랑을 가르쳐 주셨던 분, 그 받은 사랑을 나도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에서이다. 한국어라는 도구를 통해서.

    몸도 안 좋아지셨지만 여전히 책을 사랑하시는 할머니, 한국식당에서 남편과 식사를 하며 내 생각이 났다며 이메일을 보내오셨다. 일본에 사는 한국 난민의 이야기, Min Jin Lee라는 작가가 쓴 <Pachinko>를 잘 읽고 계시다는 얘기를 담고 있었다.  메일함의 Alaine이라는 이름을 클릭하는 순간 손끝으로 그리움 같은 우정이 진하게 전해졌다. 따뜻한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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