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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lf Feb 22. 2021

결국 배우기 싫었던 거잖아

핑계뿐인 오만함

혼자서 해 버릇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무능(無能)에 닿게 된다. 책 또는 사람한테 얻은 정보는 물론 목적지를 향한 가장 빠른 길이겠지만, 배우는 것에만 매몰된다면 같은 길을 빙빙 맴돌 수밖에 없다. 무엇이 됐든 참신하려면 어찌 됐든 새로워야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배웠다 치면, 열 하나를 던질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저 배우기만 하는 것이 컴퓨터에 자료를 정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수많은 '남'의 지식 정리본이 아닌, 지식을 움직이는 숨겨진 톱니바퀴를 찾아내는 것. 그러기 위해선 '수용'이 아닌 '납득'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 아홉까지만 배우더라도 열을 상상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저자의 근사한 해석과 세련된 정리를 애써 등지고, 스스로의 싹을 틔우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튀운 싹은 당연히 보잘것없겠지. 오랜 시간 사포질 한 나무가 반딱반딱하듯, 많은 노력과 시간으로 갈고닦아 빛을 내고 있는 원석과 비교하여 나의 작품이 더 눈에 띈다면 그것이 바로 모순이다. 하지만 그렇게 볼품없는 작품들이 모여야만 '나'를 만들 수 있다. 남의 정리본이 아닌 '나' 말이다. 근사하진 않을지 언정 나름의 고민과 고뇌로 피운 것들이 서로 엮이고 먹히며 어울려야 식물원이 아닌 숲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나는 대학교에 들어온 후, 배움을 게을리했다. 공부를 게을리했다는 말은 아니다. 꿀강을 찾아들었다곤 하지만 학점도 좋은 편이었고, 과제 제출이나 시험 준비 역시 언제나 끝을 보곤 했었다. 하지만 나의 칼을 뽑아내야 한다는 강박감에 언제나 빙빙 둘러 안 그래도 긴 길, 돌아가곤 했었다. 결국은 책이 제시한 목적지로 갈 것이면서 말이다. 효율의 문제였다. 너무 완벽히 하려다가, 본질은 놓치고 디테일만 챙겼다. 지식을 관통하는 흐름은 대학생이 혼자 책 앞에서 2시간 동안 끙끙거려 떠올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철저한 척하는 나의 오만함에 그만 속아버리고 말았다.


수많은 성현들의 정리된 방마다 다 헤집어놓고는 책상 위 지우개까지도 면밀히 살피다 보며 공부하다 보니, 점점 익힘은 나에게 부담이 되었다. 남들에 비해 한없이 느린 속도에 스스로도 많이 위축되어 자존감도 많이 잃었고, 필요한 압도적인 시간 역시 감당하지 못해 지식의 이해 수준도 현저히 떨어졌었다. 그렇게 배움은 남들보다 더 무겁고 막막하게 다가왔고 배움보다는 고민하는 습관이 생겼다. 책을 보지 않고, 책의 내용을 상상하는 것. 배움이 결여된 고민은 자존심만 억세게 만들었고, 지식의 검증이라던가 지식의 통합의 절차를 꺾어버렸다. 결국 나는 나의 2시간이 수많은 성현들의 2시간과 같을 것이란 오류를 범한 것이다.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건 동기들에 비해 부족한 지식과 직관을 보며 깨닫게 되었다.


검증이 일어나지 않으니, 매 순간 볼품없는 직관들은 개선되지 않고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만 하였다. 부실한 기초공사에 내가 쌓은 지식의 탑은 남들보다 높이가 현저히 낮았기에 탑에서 바라본 전망 역시 한정적이었다. 아는 만큼 보이기도 하지만, 보이는 만큼 안다. 보이질 않으니 고뇌의 범위는 한정적이었고, 부실한 기초공사에 고뇌의 깊이 역시 터무니없이 부족하였다. 결국은 효율의 문제였다. 일단은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서 탑을 견고히, 높이 쌓고 나서 어느 수준이 되었을 때 회고라던가 고뇌를 해도 충분했을 텐데, 너무 하나하나 힘을 주느라 결과물이 초라했다. 부족한 양분과 성급한 마음으로 꽃을 피우려 하니 당연히 꽃이 작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결국 난 배우기 싫었던 것이다. 느린 이해 속도로 배울 때마다 쩔쩔매는 자신이 한심하고 멋있지 않아서, 더딘 이유를 설명하기 급급했던 것이다. 그런 설명이 어느 순간 주객전도되어 나를 더디게 만들었다. 느린 게 더 멋진 거야라고 말하고 싶었기에 느리면서도 더 느린 길로 갔던 것이다. 물론,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하나부터 열은 물론 백까지 돈과 학원으로 해결했었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증명에 목말라한 것도 분명 한몫했을 것이다. 이제는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겠지라는 심정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만들어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너무 오만한 생각이었다. 우선 하나부터 열까지는 배우고, 열 하나를 뽑아내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일인데,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했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와 현실 사이 괴리감은 비겁한 변명으로 이어졌고, 그럴듯한 변명에 허점을 끝끝내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는 것보다 내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비옥해야 식물이 자라고, 다양해야 변화가 일어난다. 지식이 있어야만 직관이 있을 수 있고, 깨달음은 검증을 거쳐야만 비로소 완성된다. 기본만큼 근사한 것이 없어서, 이를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내공이 필요하다. 유의미한 도전 뒤엔 수많은 연습과 노력이 언제나 숨어있고, 땀이 결여된 이상은 그저 허수아비일 뿐이다. 앞서 말한 톱니바퀴로 세상 속 수많은 개별 사실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기에 지식을 뿌려야만 간접적 관측이 가능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복잡하게 뿌릴수록 단순히 모양을 드러낸다. 배움을 게을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자. 물을 맞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꽃을 피울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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