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다는 말 하지 마!
아이가 5살에 접어들 때쯤, 무시무시한 공주병이 찾아왔다. 시작은 겨울왕국에 엘사였다. 엘사처럼 레이스가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왕관을 쓰고 거울 앞에 서 있는 시간이 늘었다. 손에 매니큐어를 발라주면 세상 행복해했고 내 립스틱을 몰래 가져가 떡칠을 해 놓는 일도 있었다. 장래희망은 공주. 왕자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딸바보 아빠는 충격을 받고 쓰러질 뻔했다(!)
어느 날 아이가 내게 오더니 울 듯한 얼굴로 심각하게 물었다. “엄마도 죽을 거야?” 이유를 듣고 보니, 아이의 우상인 엘사, 백설공주, 신데렐라 등 동화 속 공주의 엄마는 다 죽는단다. 엘사 공주의 엄마는 배를 타고 가다가 파도에 휩쓸려 죽었고 백설공주랑 신데렐라 엄마는 ‘아예 옛날에’ 죽었단다. 인어공주도 아빠는 있는데 엄마는 안 나오는 걸 보면 죽은 것 같단다. 공주이길 포기할 수 없는 아이에겐 너무나 가혹한 설정이었다.
대체 공주는 왜 다들 엄마가 없는 걸까. ‘엄마 없는 공주 좀 봐 얼마나 힘든지 알겠지? 그러니까 엄마가 있을 때 말 잘 들어’ 라는 협박인가. 아이들이 가장 두려워할 설정으로 아이들에게 겁을주려는 어른들의 심리가 들어간 건 아닐까. 말 안 듣는 아이들을 잡아가는 망태할아버지가 대대손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이맘때 아이들에게 엄마는 세상의 전부기 때문에 엄마가 없이 혼자 살아야 한다는 공주의 환경이야말로 망태할아버지가 잡아가는 것 만큼의 공포를 준다.
작은 딸은 거의 밤마다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우는데 '유치원에 간 사이에 엄마가 없어질까봐 두렵다'고 한다. 세상 까불거리는 아이들도 엄마가 옆에 없으면 주눅이 든다. 그 뿐인가. 아이들에게 엄마는 슈퍼우먼이나 마법사 이상의 존재가 되기도 한다. 엄마가 ‘거짓말하면 코 길어진다’ 하면 정말 그런 줄 알고 코를 살핀다. ‘엄마는 안 봐도 다 알아’ 하니까 ‘엄마 나 어린이집에서 친구한테 양보했는데 엄만 다 봤지?’ 한다. 아이가 생각하는 엄마의 존재가 이 정도다.
디즈니 ‘말레피센트’를 제작한 돈 한(Don Hahn)은 "대부분의 디즈니 영화는 80분에서 90분 내로 끝납니다. 그리고 디즈니 영화는 대부분 주인공의 성장기를 묘사하지요. 이때 자기 인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순간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부모가 없는 상황에서는 주인공이 빨리 성장해야 하니까요. 엄마가 죽자 좋으나 싫으나 어른이 되어야 했던 '밤비'처럼요. 아빠만 있던 벨은 아빠마저 길을 잃고 사라지자, 사건에 뛰어들잖아요. 즉, '엄마'가 없는 설정은 이야기를 빨리 진행시키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사고로 엄마를 잃은 월트 디즈니가 자신의 아픔을 주인공에서 투영시켰다는 설도 있다. (출처: https://m.huffingtonpost.kr/2014/09/17/story_n_5834136.html)
우리집 두 딸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신데렐라를 보면서 감동하고, 사과를 먹고 쓰러진 백설공주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결국엔 본인도 공주이기 때문에 사과는 독이 들어있을까 봐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사과 대신 사탕이나 초콜릿이면 좋았을 텐데) 한 때는 오로라 공주 놀이가 우리집 유행이었는데 오로라 공주 역할을 맡은 아이가 누워 있으면 왕자 역할을 맡은 엄마나 아빠가 뽀뽀를 해서 깨우는 놀이였다. 정말 오랫동안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듯이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아이는 엄마 혹은 아빠를 발견하고 공주처럼 놀라는 연기를 선보인다.
TMI
“우리 딸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라고 했다가 엉엉 울며 “나는 안 예뻐 제일 예쁘지 않아!!”라고 한 시기도 있었는데 그 이유는 신데렐라 동화 속 마법의 거울이 신데렐라가 젤 예쁘다고 했다가 신데렐라가 마녀의 타깃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장난기가 많은 나는 여러 번 “우리 딸이 세상에서 젤 예쁜데 어쩌지?”하면서 아이를 울리곤 했다.
사실 딸만 둘인 엄마의 관점에서 디즈니가 맘에 안드는 점은 한둘이 아니다. 고리타분한 왕정시대를 배경으로 외모지상주의에 빠진 공주들, 남자를 만나 인생역전을 하는 캐릭터라니. 결혼 전에 나는, 계모가 학대를 하거나 왕자를 기다리는 내용의 비교훈적인 디즈니 시리지는 절대 보여주지 않겠노라 다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막상 닥친 현실은 달랐다.모두 ‘렛 잇고’ 노래를 떼창하고 공주와 왕자 역할놀이가 일상인 어린이들 사이에서 공주를 모른다는 것은 아예 사회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아이가 “엄마도 죽을 거야?”라는 질문에 이어 "공주처럼 왕자를 만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거나, 백설공주처럼 제일 예쁜 아이가 되기 위해 외모 치장에만 공을 들이려 하고 한다면 나는 아이에게 어떻게 반응을 해줘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