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시현 May 11. 2021

세모가 잘 안 그려져

존재만으로도 소중한 너

"엄마 세모가 잘 안 그려져.” 자기 전에 뜬금없이 딸아이가 말했다. 

“그렇지 세모 그리기 어렵지”  

“세모를 그리려고 하는데 자꾸 네모가 되는 거야. 속상하게” 

“연습하면 점점 나아질 거야” 

세모를 그리려다가 자꾸 네모를 그리는 아이의 색연필 끝을 보면서 어설프게 위로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아이가 씨익 웃는다. 

“그런데 엄마 있잖아. 내가 자꾸 네모를 그리다 보니까 네모가 좋아졌어 나는 네모를 엄청 잘 그려!”

긍정의 끝판왕이다. 세모 그리기 특강이라도 하려다가 아이의 미소를 보고 나도 따라 웃었다. 그래 뭐 세모 못 그리면 어떤가. 네 맘에 들면 되지. 

사실 살면서 내가 의도한 대로 되는 건 별로 없는 거 같다. 열심히 머리를 굴려 인생 계획을 세우면 예기치 못한 일들이 꼭 일어나기 마련이고 또 다 망했다고 생각할 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기도 한다. 나 역시 다 됐다  싶었을때 인생의 쓴 맛을 봤고 매번 실수하고 실패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곤 했다.


내 아이가 평생 세모를 그리지 못한다고 해도 아이가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동시에 나는 그동안 너무 잘하려고만 애쓰지 않았나 생각했다. 성적이 좋지 않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무가치한 사람으로 자책한 경험이 떠올랐다. 모든 사람은 잘하지 않아도 그 존재만으로 사랑스럽고 귀한 존재다.


한국사회는 유독 열심히하길, 잘 하길 강요한다. 근면성실을 미덕으로 삼아 '4당5락'(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이라든가,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속담이 흔히 쓰이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노동 중이다. 멕시코에서 지낼 때였다. '스페인어를 공부를 하는 중이야' 라고 말하면 멕시칸들은 십중팔구'poco a poco'라고 답한다. 조금씩 천천히 하라는 뜻이다. 한단계씩 천천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잘 하게 될 거라고 덧붙인다. '공부 열심히 해'라는 표현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한국인에게는 조금 생소한 경험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즐겁게 실패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다. 실패해도 뜻대로 되지 않아도 툭툭 털고 일어나는 회복탄력성이야말로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강력한 무기가 아닌가. 그리고 원하는 바를 성공하지 못하더라고 의미와 가치가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무엇보다 나부터 회복탄력성을 회복하고 나의 가치를 믿으며 씩씩하게 살아보려 한다. 지금은 비록 일을 그만둔 아줌마라 가끔 무기력한 기분이 들지만, 언젠가 내가 맘먹은 대로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음을 믿는다. 물론 계속 아줌마 아니 할머니로 이대로 늙어간다고 해도 나는 존재만으로도 가치 있는 사람이다.

이전 01화 나의 소듕한 돌멩이에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