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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율 Apr 30. 2024

20화 : 여름 단기 코스 (1) 기초 미술

늦깎이 대학생의 영국 유학기


킹스턴을 포함한 영국의 대학들은 방학 기간 동안 본교 학생이 아니어도 신청 할수 있는 다양한 중, 단기  수업(short course)을 연다.

(학기 중에 여는것도 많은데, 이건 주로 본교 학생 위주. 대부분 소속된 과는 상관 없이 들을 수 있었고, 요리 교실처럼 가격도 무료인 것도 있었다.)


내가 2014년 여름 동안 듣고 있던 BA preparation 코스의 스케줄에는 기초 미술 수업과 파운데이션 체험 수업, 이렇게 두 가지의 미술 단기 수업이 포함되어 있어서 2주일 동안 수강을 하게 되었다.

매년 이런 식으로 정보가 미리 공지되고, 학교 홈페이지나 안내 데스크에서 정보를 받을 수 있다.  가격은 코스와 기간마다 다양하고 완료하면 수강증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있다.




여름 단기 미술 코스가 시작되는 첫 날,  평소처럼 아침 8시 첫 차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수업은 10시가 넘어 시작하지만 도착까지 1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첫 차를 타면 다른 학생들도 없어, 붐비지도 않아 좋았다.

거기에 이른 아침의 상쾌한 공기는 즐거운 덤!  

 

이젠 통학버스를 헷갈리지 않아요

 



이 주에 듣게 된 기초 미술 수업 코스는 예술대 본관에서 우리 외에 고등학생 3명이 함께 수강하게 되었다. 낯선 곳과 낯선 사람들이 어색해서 쭈볏거리면서도, 같은 반 친구라고 우리 뒤를 포르르 포르르 쫒아 다니던 귀여운 청소년들!

  

조용하고 순둥순둥한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기초 미술을 가르친 튜터는 Mercy Kagia(이하 튜터 멀시)라고 하는 케냐 출신 일러스트레이터로, 킹스턴에서 학사/석사를 한 직속 선배님이셨다.

 킹스턴이 한국의 홍익대학교와 자매결연이 되어 있어서 교환학생으로 일년 간 한국에서 지냈다는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한국말 발음이 좋았고, 또 굉장히 유쾌했다. :)




그렇게 줄곧 유쾌하고 귀여웠던 5일간의 기초 미술 수업 중 첫번째는,








첫번째 수업, "표현"

: 자신에게 의미 있는 물체 하나를 자유롭게 표현해보기


내가 선택한 물체는 손바닥만큼 큰 조개 껍데기.  


지난 주, 스튜디오로 가는 다리 위에서 발견했던 것인데, 누군가 프로젝트를 하며 잔뜩 모았다가 남아버린 것인지 카트 안에 조개 껍데기 더미와  "take one please!" 라고 쓰여 있는 메모가 있길래, 하나 받아온 것이었다.


Please 에서 절실함이 느껴졌던..
하지만 역시 받아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지 다음 주에 가보니 강 바닥에 방생(?)되어 있었다.

  

 

별거 아닌 조개 껍데기이지만 학교에서 다른 학생에게서 무언가를 나눠 받은것이 왠지 내가 같은 킹스턴의 학생으로 소속 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해 매우 기뻤지. :)


학교에서의 첫 기념품..이걸 점토를 써서 내 감동의 크기만큼 매우 크게 표현해볼까!

 


다행히 교내 화방에서 점토를 팔고 있어서 질감 표현을 위한 거즈, A1 사이즈 종이와 함께 사서  바로 대형 조개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이즈가 좀 커보이긴 하지만, 이틀이나 시간이 있고 그냥 종이에 얹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문제 없지!


-가 아니었지!


싸고 안 굳는 클레이 주세요! 했더니 가래떡 같은 흰 점토를 주길래 지점토인가 하고 받아왔는데, 처음 보는 종류의 그 클레이는 지점토와는 달리, 단단도 아닌, 딴딴한 강도를 가지고 있었다.

찾아보니 이 점토는 폴리머 클레이(플라스틱 성분으로 만들어진), 굽기 전에는 마르지 않고 모양 변경이 자유로우며, "단단"하기 때문에 정교한 작업이 가능한 점토였다.


근데 이제 점토를 무르게 반죽해서 A1 사이즈의 바닥을 다 채우고 입체 조개를 만들어 하는거지.  454그램짜리 최소 3개를 써서.



망했네 이거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거친 길을 스스로 가는 인간은 그 후 이틀간..


크기가 커서 기숙사로 가져가서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수업 시간동안 끝내느라고 필사적으로 작업.



지문이 닳을 정도로 반죽하고 붙이며 다시는 짧은 시간 안에 무식한 도전은 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며 지옥 같은 작업 시간을 버텼다.



A1 용지를 을 악으로 가득 채웠다..





이 수업에서 얻은 것 중 가장 큰 것은 이틀 만에 생성된 강인한 팔뚝 근육이었다.







두번째 수업, "정물화(Still Life drawing)"

: 물체를 그려보자


전쟁 같던 표현 수업이 끝나고 평화로운 정물화 수업이 시작되었다.

수업은 기초 소묘와 그림자 개념을 짧게 배우고, 그 다음에는 그런 요소들이 들어간 사물을  다양한 선의 사용이나 표현 법으로 그려보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현직 작가인 튜터 멀시의 노하우를 잔뜩 배웠는데, 덕분에  까다로워 보여서 그리기 꺼렸던 파인애플이나 버섯 같이 복잡한 물체들도 방법따라 의외로 간단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한단계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 날 수업에는 특별한 손님이 찾아오셨는데, 바로 튜터 멀시의 이전 학생이었던 할아버지셨다.

지금 수강하시는 수업의 일환으로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는 과제가 있어서 찾아오셨다고.

"이게 내 그림이야," 수줍게 웃으며 쑥스러워 하면서도 자신의 그림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시는 할아버지를 보며, 내가 지금 무엇을 좋아하고 열중하는데 나이는 없는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어지는 환경에 있다는것에 새삼 감동했다.

 

그리고 그렇게 고등학생들,이십대 반 친구들, 삼십대의 나, 백발의 할아버지는 한참 즐겁게 그림 이야기를 했다.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예술하는 친구!








세번째 수업, "라이프 드로잉"

: 누드 크로키. 인체를 다양하게 표현해보자


그날, 우리의 누드모델은 나이가 60대지만 몸매는 20대 운동 선수였던 존 아저씨였다.

최고 장점인 탄력있는 엉덩이 라인을 위해 꾸준히 운동하고 있다는 프로 모델 존 아저씨는 자신의 최애 아이템, 핑크색의 투투를 입고 시종일관 바쁘게 움직이며 여러가지 다양한 포즈를 보여주셨다.  


누드모델 크로키 수업이라고 하면 비슷비슷한 자세에 비슷한 소품을 쓰는 것 밖에 떠올리지 못했는데, 다양한 소품을 준비 해온 존 아저씨 덕분에 시야가 넓어지는 시간이 되었다.  

크로키란! 재미있는 거구나! 라는 것을 알려준 감사한 모델!









네번째 수업, "로케이션 드로잉"

: 야외에서 그리는 일상의 모습들

 *(어반 드로잉이라고 많이 표기되는데 킹스턴에서는 도심을 포함, 야외에서 하는 드로잉들을 통틀어 로케이션 드로잉으로 불렀었기에 그렇게 표기했다.)



이동하면서 일상의 모습을 그리는 로케이션 드로잉이라는 그림의 종류를 알게 된 이날은 마침 시내에 푸드 패스티벌이 열린 날이었다.


 


공짜 시식 요리도 많고 이벤트가 많아 사람들이 가득 찬 시내는 활기차고 에너지가 넘쳤다.


하지만 가뜩이나 공공장소에서 스케치북을 펼치고 그림을 그린다는게 처음이라 쑥스럽고 어색한데 거기다 하필이면 축제 날이라니!

한참을 구석에서 쭈볏거리며 서있었지만 도무지 그 자리에서 하기엔 용기가 안나서 그냥 카페에 들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으니, 얼마 안가 튜터 멀시에게 잡혔다. 아니 여기 2층인데 여기 있는거 어떻게 알았지!

광장에서 바로 보이는 창가에 앉아있었다는 걸 잊어먹음..


너무 한 곳에서 편하게 있으면 안돼~ 내가 다 보고 있어! 라며 그녀가 주고 간 체리 한 줌을 먹으며 용기내어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것! 이 아니라 앉아서 버티는것!을 목표로 광장 한 구석으로 용맹하게 달려가 주저 앉았다.

얼마간 모두가 바쁘게 걸어가는 거리를 한참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멍하니 있었더니 어느새 쪽팔림도 없어지고 마음이 점점 평온해졌다. 물결처럼 흐르는 발들을 보고 있자니 내 시간이 느리게 흐르며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감상하듯 거리를 관찰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양한 모습들을 그렇게 얼마나 그렸을까, 생각보다 사람들이 관대하게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을 이해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술 대학이 있는 동네여서 여기저기에 주저 앉아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의 모습이 일상이어서인지, 눈이 마주치면 엄지를 척 하고 올려주거나 포즈를 취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한나절 도시를 누비며 그림을 잔뜩 그리고나니 어디서든 주저 앉아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졌다. 안정된 책상 앞이 아닌 거리에서 그리게 되니 내가 그릴 수 있는지 몰랐던 평소보다 좀 더 자유롭고 꾸밈없는 선들이 많이 나와서 더 새롭고 즐거운 시간이었던것 같다.

 






마지막 수업 날 이기도 했던 이 날 오후에는 다같이 Rose theater 이라는 전시장,연극 무대, 상영장, 카페가 합쳐진 복합 예술 공간에서 무료 커피(푸드 페스티벌)를 마시며 그날 그린 그림의 피드백을 했다.

 


튜터이자 선배인 멀시의 향후 계획에 대해 들을 수 있었는데, 그녀는 이 여름이 끝나면 영국을 떠나 독일에 있는 대학에서 그림을 가르치게 된다고 했다.

가능한 여러 나라를 다니며 학생들을 가르쳐 생활비를 마련하여, 자신의 작품에 집중할 금전적으로도 영감 자극적으로도 여유로운 환경을 만들어 내는 그녀의 똑부러진 삶의 방식을 듣고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졸업한 모두가 자기 작품만으로 먹고 살 수 있는게 아니지. 그리고 작품에만 집중 할 수 있는 여유로운 생활 또한 보장되어 있지 않아.

학생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 동안 최대한 현실적으로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돼!


그렇게 정신을 확 차릴만한 여러 조언과 의견을 한참 나누고 마무리는 튜터와 학생이 아니라 동료 작가로 돌아와서 서로의 삶에 행운을 비는 것으로  즐거운 일주일 수업이 끝났다.

 





보너스, "멀시의 쿠키"





일주일 동안 당 떨어질 때 먹으라고 멀시가 가져온 쿠키 세트. 쿠키들이 너무 맛있어서 일주일동안 모두 마구마구 먹어댔었다.




살이 차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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