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빠져 침대 위에 앉아 울고 있던 (지난 화 참고) 내 머리 위로 날아들었던 그림자들은 절대 룸메이트가 되고 싶지 않은 세입자,
바로 벌레였다.
( 정신 건강을 위해 벌레를 예쁜 별로 바꾸어 그렸습니다 )
이사를 당한 새 방의 창문 근처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방충망도 없는 창문은 계속 열려있었다.
거기에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 그리고 환하게 불이 켜진 방까지 더해졌으니 그들에게는 오랜만에 열린 파티장이 된 셈이었겠지.
우레와 같이 쏟아지는 열렬한 환영의 날갯짓 소리를 소리 없는 비명으로 응수하며, 다급히 벗겨낸 침대 시트를 휘둘렀다.
( 혹여나 입에 들어올까 봐 입을 열고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
그렇게 얼마나 춤을 추었을까, 드디어 이전 세입자들을 모두 내보내고 이젠 놀랄 일은 없겠지 하고 쉬려고 의자에 앉으려는 순간! 또 무언가를 발견해 버렸다.
이 방 전 주인이 금발을 가지고 있고, 청소를 매우 싫어하는 학생이었던 건지, 짜임이 굵은 천으로 되어 있던 책상 의자의 쿠션 부분에 빽빽이 머리카락이 박혀 있었다.
( 정신 건강을 위해 오염 부분은 별로 그렸습니다 )
서둘러 방과 화장실의 상태를 살펴보니, 같은 구조의 시설임에도 저번 방에 비해 굉장히 컨디션이 안 좋았다. 하지만 이제까지 당한 일을 생각해 보면,.. 응.. 방을 옮겨달라는 요청도 절대 들어주지 않을 것이 뻔해..
그래, 그냥 마음을 비우고 죽을힘을 다해 청소를 하자.
분노해 보았자 나의 정신 건강만 소모되잖아. 대화가 통할 만한 인격을 가진 상대가 아닌 걸.
(하지만 화나는 건 화나는 거니까 그 인간이 오래오래 변비를 앓아서, 배가 맨날 딱딱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날 그나마 좋았던 것은, 전 주인이 버리고 간 선풍기가 아주 잘 작동했다는 것이었다.
그걸로 열기는 식힐 수 있었으니 영 나쁜 일만 있던 건 아닌 걸로.
( 소음은 있지만 튼튼해서 그 후 2년 동안 잘 사용했다. )
자, 그럼 이걸로 해프닝이 끝났나 하면! 안타깝게도 두 번의 후폭풍이 더 있었으니.
첫 번째 사건은 토요일에 예약이 되어있었던 은행에서 계좌 개설을 퇴짜 받은 것이었다.
영국에서 계좌를 열기 위해서는 상담 예약을 해야 하는데, 당시에는 직접 방문해서 예약을 해야 했다(현재는 온라인으로 가능).
그 후에 학교에서 나의 신원을 증명할 은행 제출용 서류를 받은 뒤, 예약된 날짜에 은행에 가서 계좌를 개설하는 것이다.
은행의 팸플릿 디자인이 다양해서 재미있었다.
그런데 나는 목요일에 방이 옮겨져 같은 기숙사 부지 안이라고 해도 건물 명과 방 번호가 바뀌었기 때문에, 받아 둔 서류를 사용할 수 없었다.
새 서류를 받으면 해결 됐겠지만!
하필 그 주에 학교의 담당자가 일주일 간 연수로 학교에 없었기에, 예약 단계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 이렇게 미뤄진 은행 오픈은 한 달 후에 더욱더 큰 문제로 이어졌는데...! - 계속 - )
두 번째 후폭풍이자, 악몽의 주말을 완성시킨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다음 날인 일요일!
새벽 2시쯤, 갑자기 복도에서 남녀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플랫* 현관문 바로 옆에 있던 새 방에서는 완벽하진 않고 웅웅 거리듯 들리긴 하지만 건물 복도에서 나는 소리가 잘 들렸기에, 옅게 잠에 들었던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바로 잠에서 깼다.
어..?
지금 이 건물에는 나밖에 안 살고 있는데 누구지..?
다른 동 학생들이 술에 취해서 건물을 잘못 찾았나?
음... 아니면 관광객이 늦게 체크인을 한 건가..
이전 플랫에서도 내 방 외에는 비어 있었기 때문에, 가끔 관광객이 숙박을 하고 갔었다.*
그리고 그게 아니라 해도 플랫 현관문은 물론이고 개인 방은 열쇠가 없으면 열 수 없으니, 딱히 위험한 상황이 될 일은 없겠지 싶어서 신경을 끄고 다시 누워 잠을 청했다.
관광객이면 좋겠다...
그 사람들은 식료품을 샀다가 남으면 나눔 하고 가니깐... 쿨..
목소리는 점점 나의 플랫까지 올라왔고, 여기가 맨 꼭대기 층이니 내 플랫에 머무는 관광객이 확실하구나 생각하며 잠에 빠져드는 찰나였다.
철컥! 하고 현관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 것은, 이 공간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소리,
경찰의 무전기 소리와
다급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여러 명의 무겁고 두터운 발자국 소리였다.
그리고 그렇게 현관문이 열림과 동시에 내 방 문고리도 확! 하고 돌아갔다.
꿈인가, 비몽사몽 하고 있던 정신이 번쩍 들었고,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How are you?! (누구야?!)”라고 물었지만 상대방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들려온 것은 오직, 잠긴 방문을 열기 위해 키 뭉치를 들어 올리는 소리.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뛰어 내려가 방문을 막아 서고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며 호통을 치자, 그제야 자신은 경비인데 문을 열어 보라는 대답이 들려온다.
경비?
옷을 대충 껴입고 문을 열자 과연 경비원 차림의 여성과 남성 두어 명이 서있었고 어째서인지 나와 같이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 너 혹시 여기 살고 있니?”
“….??? 목요일에 여기로 옮기라고 해서 그날부터 살고 있는데요.”
“아, 그래. “
그 짧은 대화를 끝으로 그들은 어떠한 설명도 없이 나가버렸고, 나는 얼이 빠져 그 자리에 계속 굳어있었다.
얼마를 그러고 문 앞에 서 있었을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급한 용무가 있다면 핸드폰으로 전화를 먼저 해보면 될 것을, 아무런 통보 없이 새벽에 막무가내로 방 문을 따고 범죄자를 급습하듯 들이닥친 사람들이라면, 문제 상황이 해결된 게 아닌 이상 또 그럴 수 있겠지.
안 되겠어. 지금 리셉션(사무실)에 가서 뭐가 문제인 건지 물어봐야겠다.
결심을 하자마자 바로 리셉션에 달려갔다. 새벽이라 사람이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아까 그 경비원 분들이 계셨다.
아까는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것인지 연유를 묻자, 내가 옮겨진 그 건물에는 사람이 안 사는 걸로 기록이 되어있는데, 새벽에 방에 불이 켜 있으니 확인하러 간 거라고 한다. 그래서 노크도 없이 문을 따고 들어 온 것이고(사람이 없거나 불법침입자라고 생각했던 모양).
내가 옮겨진 것이 벌써 며칠 전인데 아무것도 듣지 못했냐고 했더니, 전혀 보고 받은 것이 없단다.
와.. 내가 이렇게까지 분노한 것은 실로 몇 년 만이야....
누가 업무를 제대로 안 한 것인지 너무 명명백백한 상황(퇴근해야 하니 한 시간 안에 방 빼라던 그 사람 밖에 없지..).
거기다가 내 플랫만 나 외의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그 건물 전체에 다른 사람이 안 산다고?
건물 소독 해야 하니까 학생들을 옮긴다고 하더니, 나만 옮겨진 거야 그럼?
아니, 대체 왜?
으으 화나!!
어떻게 보면 같은 피해자인 경비분들과 잘 이야기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지만, 화가 난 마음과 언제든 누가 침입할 수 있다는 불안한 마음 때문에 쉽사리 다시 잠에 들 수 없었다.
한참 고민하다가, 방문에 학교에서 받은 기숙사 비용 납부 영수증과 입주 허가의 내용이 담긴 인쇄물과 아래의 자필 경고문을 써서 붙였다.
나는 정당한 가치를 지불하고 여기에 살고 있는 학생이며,
강제 침입이나 이동 등의 부당한 행위를
일말의 사전 연락도 없이 또 행할 경우 법적 대응을 하겠다.
문의나 문제가 있으면 내 연락처(번호)나 내 담당자 누구누구에게 연락하라.
그리고 이런 고지를 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려 친구들에게 공개했다.
(종이를 떼어 버릴 수 있으니까)
그러고 나서 방문을 캐리어로 막고, 무리하게 침입하려 하면 떨어져서 큰 소리가 나도록 쓰레기통(철제였다)을 올려두었더니 그제야 계속 떨리던 손이 멈추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도 역시나,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잠은 들 수 없었다.
플랫 (Flat) :
영국의 주거 형태. 한국의 고시원과 비슷하다. 한 건물에 8~12개의 방이 있는 다수의 플랫이 각 층과 구역마다 존재하고, 각 플랫마다 공용 부엌과 휴식 공간(경우에 따라 욕실+ 화장실도)이 따로 있다.
테이트 모던(Tate modern) :
센트럴 런던의 뱅크사이드에 있는 현대 미술관. 화력발전소를 리모델링한 거대한 건물. 전시장 외에도 전망대가 있어서 밤에 가면 멋진 야경을 볼 수 있다.
학교 기숙사에 관광객? (학교마다 규정이 다름):
대학가에 있는 사설 기숙사뿐 아니라, 대학에 속해 있는 기숙사도 학기 중이 아닐 때는 관광객도 예약을 하면 단기간 묵을 수 있다. 가격은 호텔과 같거나 조금 더 저렴하고 민박이나 호스텔보다는 비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