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워킹맘] 갑자기 OO엄마로 불리게 되었다
"OO 엄마도 밥 먹어야지"
아이를 낳은 지 100일도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아직 통잠을 자지 못하는 아이를 옆에 두고 수유와 쪽잠을 반복하느라 지쳐서 아이 옆에서 자고 있었다. 삐삐삐. 남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당시 친정엄마가 육아를 도와주기 위해 우리 집으로 출퇴근하고 있었다. 엄마는 들어오는 남편을 바라보며 배고프니 어서 저녁을 먹으라는 소리를 하며, 남편에게 저런 말을 했다. 잠결에 어렴풋이 들었지만, 그 단어가 또렷이 귀에 박혔다.
OO 엄마?
내 이름은 어디 가고 아이의 이름만 자리 잡은 거지?
항상 이름으로 나를 부르던 엄마가 저렇게 나를 부르는 게 어색했다.
나는 그대로인데,
어느 날 갑자기 OO 엄마로 불리게 되었다.
아이를 낳고 6개월 동안은 정신없이 지냈다. 그전까지 당연하게 생각했던 먹고 자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아이는 3시간 간격으로 깨서 밥을 달라고 울어댔고 나는 반쯤 깬 상태로 수유를 했다. 수유하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수유가 끝나면 아이 트림을 시키고 어깨에서 잠들어버린 아이를 침대에 내려놓고 나도 옆에서 쓰러져서 자기를 반복했다. 다행히 엄마가 도와준 덕분에 밥은 제때 챙겨 먹을 수 있었지만, 그 밥도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그저 살기 위해 밥을 먹고 잤던 것 같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고 서서히 아이가 밤에 통잠을 자기 시작했다. 아이를 3시간 간격으로 수유하면서 생체리듬이 바뀌었기에 새벽에 깨어났는데 아이가 아직 곤히 잠들고 있었다. 그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잠자리에 들었고, 아침까지 푹 잘 수 있었다.
아이가 통잠을 자기 시작한 뒤로 동네 문화센터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동안 집에만 갇혀 있었던 나에게 드디어 탈출구가 생긴 것이다. 아이를 위한 수업이었지만 아이가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엄마들이 모든 걸 도와줘야 했다. 사실 어린 아기들 수업은 엄마들을 위한 수업이다. 한눈에 딱 봐도 육아에 지친 동네 엄마들이 아기띠를 하고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왔다. 문화센터에서 또래 아이를 가진 엄마들을 만났다. 6개월 동안 가족 이외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못했던 나에게 새로운 관계라는 열망을 충족시켜준 것이 문화센터였다. 그곳에서 만난 엄마들과 매주 돌아가면서 집에 모여 공동육아를 했다. 육아가 한결 편해졌다. 때로는 밤에 엄마들끼리 만나 그동안의 한풀이라도 하듯 수많은 말과 에피소드를 토해냈다.
누군가의 엄마로 사는 게 조금 익숙해질 때쯤 복직 시기가 다가왔다. 복직 전 미리 신청해둔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다. 어린이집에 입소하기 위해서는 순위가 높아야 한다. 그 순위는 맞벌이, 편부모, 아이의 명수에 따라 결정되는데, 요즘 같은 맞벌이가 많은 시대에 맞벌이는 그냥 기본 점수였다. 형제자매가 없던 우리 아이는 순위가 높지 않아 국립어린이집이 아닌 가정어린이집에 보내야 했다. 처음 아이를 데리고 가정어린이집에 갔을 때 그 규모에 깜짝 놀랐다. 우리집만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매일 부대끼면서 지낸다고 했다. 공간이 너무 좁아서 걱정되었지만 복직을 앞두고 어쩔 수 없었다. 그곳에 아이를 보내는 수밖에. 그나마 나에게 위로가 되었던 건 문화센터에 같이 다니던 친구와 함께 다니게 되었다는 것과 선생님들이 좋았다는 것이었다.
처음 복직한 날이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아마 내가 할머니가 되어서도 그날은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시 명동에 있는 회사에 9시까지 출근해야 했기에 집에서 8시에 나가야 했다. 엄마가 일찍 와서 아이를 봐주고 있어서 나는 출근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화장하고 옷도 예쁘게 입으니 기분이 좋았다. 동네를 벗어난다는 것도 좋았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가방을 들고 현관문에서 신발을 신는데,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엄마와 10달 동안 배에 같이 있어서 그런지 엄마가 무슨 일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귀신같이 안다. 아이도 내가 어디를 가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OO야, 할머니랑 잘 놀고 있어. 엄마 회사 금방 갔다 올게."
"그래, OO야, 할머니랑 놀자."
아이는 자신의 목청의 끝이 어디인지 알고 싶은 사람처럼 울어댔다. 아이를 달래주려고 안고 얼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복직 첫날 늦을 수는 없기에 아이를 달래주다가 현관문을 열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온갖 생각들이 들었다.
'우는 아이를 두고 나오다니 난 나쁜 엄마야.'
'휴직을 1년 더 할 걸 그랬나?'
'아니야. 나도 일해야지.'
'그래도 돌이 갓 지난 아이를 두고 복직하는 건 너무 했어.'
'아니야. 아이도 적응할 수 있을 거야.'
그날은 회사에 도착해서 부장님과 팀장님에게 인사하고 팀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너무 반가웠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그날 나의 마음은 90%는 어린이집에 있었다. 아이가 잘하고 있을까? 그날따라 어린이집 학대 사건들이 왜 이리 머리에 떠오르는지, 생각을 떨치고 다시 일에 집중해봐도 어느새 아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이가 엄마를 찾지 않고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혼자 울고 있는 건 아닌 지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정신이 나간 채 회사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구두를 신고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뛰어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할머니와 재미있게 노는 아이가 보였다. 발에 힘이 쫙 풀렸다.
'다행이다 내 아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나는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그렇게 나는,
어찌 살다 보니 누군가의 엄마가 되었고,
내 이름이 아닌 OO엄마로 불리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매일 우는 아이를 두고
출근해야 하는 워킹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