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병원 #쪽파
#휴가 #병원 #쪽파
아이들 아침벨 소리에 깼다.
헉 여덟 시! 지금 나가야 병원 채혈 시간에 맞춰 안 늦는데! 양치도 안 하고 나갈 요량으로 어제 퇴근길에 벗어둔 옷을 그대로 걸치고 늦었네! 늦었어! 를 반복한다.
남편이 태워다 줄까? 하면서 거실에 나타난다. 오전 8:10, 남편 차에 몸을 싣고 아파트를 벗어나는데, 눈앞에 ‘씨앗 호떡’ 봉고가 한참 장사를 준비 중이다. 봉고 장사도 이른 시간부터 준비하는구나 '여보 진짜 쉬운 게 없고, 먹고 사는 건 치열한 전투야.' 나는 나직이 속삭인다.
항상 점심시간 이후 오후 반차 시간에 가던 서울 성모 병원에, 예약 시간이 이른 아침으로 바뀌는 바람에 평일 오전 방문은 낯설다. 서둘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향하는 내 뒤로 바쁘게 올라오는 발길 소리에 몸을 옆으로 비킨다. 젊고 예쁜 여성 젊은이 둘이서, '어떻게 늦지 않았어?!', '어 겨우 시간 맞춘 것 같아!' 아마도 둘은 출근길인가 보다. 내 옆을 뛰어 지나가는 여성의 얇고 가녀린 어깨 위로 둘러멘 에코백 속엔 무슨 짐이 저리 많이 들었을까?
예정된 시간에 채혈을 마치고, 멍이 들지 않기 위한 5분 지압시간을 위해 채혈 부스 바깥 의자에 앉았다. 앉은 방향에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채혈 담당 어린 간호사 젊은이들이 참 예쁘다. 채혈을 하며 중간중간 쉬는 순간에 옆 동료와 담소 나누는 간호사, 단골 고객인지 채혈대 앞으로 다가오는 고객에게 활짝 웃음 지어 보이는 간호사들. 오전 9:00, 나는 평소 같았으면, 오전 모닝커피를 다 마시고 이메일을 한참 읽고 한숨을 짓고 있을 시간이다. (휴.. 이런 주제의 이메일은 대체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 거야? 하면서...)
지하 베이커리로 내려가서 내가 아침 메뉴로 좋아하는, 크로와상 샌드위치와 콜드브루 디카페인 커피를 주문한다. 병원 관계자들과, 나처럼 병원을 찾은 고객들로 줄이 길다. 다들 아침 먹을 시간이니까. 빵과 커피를 다 먹고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가, 의사 선생님 면담 호출을 기다리며 핸드폰을 쳐다본다. 유독 아이 환우와 엄마의 커플은 항상 눈길이 잘 떼어지지 않는다. 방금 내 앞을 지나간 아이도 어서 나아서 빨리 퇴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담당 머리 큰 의사 선생님은, 혈액 수치가 좋아졌다면서 얼굴에 웃음을 짓는다. 내 수치가 좋으니 담당인 선생님도 기분이 좋은가보다.
오전 10:30, 고속버스터미널에 나는 있다. 어제의 지루한 회의시간에 나는, '내일 휴가니까, 고터에 가서 정말 예쁜 스니커즈를 사야지. 그게 맞게 알록달록한 양말도 살 거야. 봄이 오는 것 같은데, 간단한 스웻셔츠에 청바지라도 사고 기분을 내볼까?' 생각을하며 간신히 버텨냈다. 그런데, 정작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병원 일정을 마치고, 쇼핑을 하려 하니 급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저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분명 어제의 사무실 안에서의 고속버스터미널은 핑크빛이었는데, 실상 오늘 내가 실제로 있는 세상은 핑크빛이 아닌 그냥 평범한 일상이 되어있다.
지하철을 타고 우리 동네에 돌아오자 오전 11:30, 평소 같았으면 이제 점심 먹으러 슬슬 바깥으로 나갈 준비를 할 시간이다. 겨우 병원에 가서 채혈하고 샌드위치 사 먹고 의사 선생님 얼굴 잠깐 보고 왔을 뿐인데, 그 힘든 출근 오전 시간이 다 갔다니, 사무실 밖 생활 별거 아니구나! 우리 아파트 초입에 들어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횡단보도 앞 채소 할머니는 좌판을 여시고 싱싱하게 다듬은 쪽파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계셨다. '얼마예요?' 조심스레 여쭙자, '요즘 물가가 너무 비싸요, 세상에 이만큼이 5천 원이에요.' 한주먹밖에 안 되는 쪽파가 5천 원이라니, 잘 쓰지도 않는 현금으로 나는 정성스레 천 원짜리 5장을 꺼내어 건넨다. 우리 남편이 알면 구박하겠지만, 나는 어제 사무실에서의 사무실 밖 판타지를 쪽파 5천 원으로 채웠다.
평일 사무실에 있을 땐, 11:30 쪽파를 사 들고 집으로 갈 일이 없을 테니까. 쪽파 부침개를 부쳐, 방학 마지막평일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과 맛있게 나눠먹으며, 하하 호호 시간을 보낸다. 이 방학이 끝나면 아이들은 곧 학교로 복귀하고, 당분간 평일 낮엔 아이들과 밥 먹을 일조차 없을 테니까. 귀하지 않은 순간이 없구나. 내가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오전은 다른 사람들도 열심히 각자 자신의 일터에서 치열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사무실에서의 바깥세상의 판타지는 판타지일 뿐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