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는 딸 사랑받으려 애쓰는 딸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빠를 무척이나 따랐다. 나는 아빠쟁이였다. 새끼오리가 엄마 오리를 뒤쫓듯 아빠 뒤를 졸졸졸 쫓아다녔다.
[유치원입학 전]
우리 아빠 세대가 그랬듯이, 아빠는 월화수목금금금을 출근을 하곤 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아빠가 주말에 출근하는 것을 정말 참을 수 없이 싫어했다. 어느 일요일 오전이었던가, 아빠가 출근을 못하게 아빠 앞에서 엉엉 울고 있자니, 아빠가 이리 오라며 내 머리를 양갈래로 따 주었다. 내가 좋아하던 캔디 캔디 방울로 양 머리를 꽁꽁 묶어 주었다. 아빠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 나를 회사로 데려갔다. 그런데 사무실 안까지는 보안문제로 따라가질 못했고, 회사 들어가는 입구의 경비실 같은 곳에 나를 맡겨두었다. 나는 추운 겨울 난로를 쬐며 경비 아저씨가 건네주는 사탕을 물고 아빠를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아빠가 어느 주말엔 회사 분들과 함께 산에 간다고 했다. 내가 따라간다고 했었을까? 어떻게 아빠를 쫓아가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진 않는다. 하지만, 아빠와 함께 한 목적지로 가는 관광버스 안에서는 "아 트랄랄라~ 아 트랄랄라~ 노래 부르며, 산 너머 물 건너가는 길, 가을 길은 고! 운! 길!" 하며 마이크를 잡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는 마침 가을이었고,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아저씨들의 주말 등산길을 수놓았다. 그때 노래를 부르고 예쁜 스누피가 그려진 필통을 받았는데, 두고두고 그 필통을 아끼며 사용했다. 우리 애들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동요 '가을길'은 아직도 실려있는 걸 보고는 반가웠던 기억이 있다.
평일 저녁엔 아빠 회사 분들이 저녁에 많이들 놀러 오시고 담배도 많이 태우시고, 엄마는 끊임없이 음식을 하시곤 했다. (우리 엄마 진짜 현모양처였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아저씨들 옆에 앉아있곤 했는데, 아저씨들이 내게 주로 하시는 말씀이 있으셨다. "너네 아빠가 너를 얼마나 이뻐하는지 알아? 너 아빠한테 잘해야 돼. 네 이야기만 하루 종일 회사에서 하신다!" 아빠가 내가 이뻐서 날 좋아한다는데, 나는 왜 아빠에게 잘해야 하는지 이해는 안 갔지만, 여하튼 내가 좋아하는 아빠가 날 좋아한다니 그것도 좋았다.
아빠는 내게 최고 멋진 남성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아빠가 호주인가 뉴질랜드인가로 출장을 다녀오신 길이었다. 내 몸뚱이만 한 커다란 트렁크를 가지고 집으로 들어오셨는데, 아빠가 건네는 코알라와 캥거루 인형은 참 앙증맞았다. 털이 어찌나 보드랍던지, 한창 여름이었던 그때 모기가 물려 퉁퉁 부은 손가락 위에 캥거루 꼬리에 달린 털로 슬슬 쓸어내리니, 모기 물린 간지러움도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아빠가 출장을 떠나서 부재중이면, 난 잠자기 전에 꼭 아빠 사진을 꺼내어 잘 자라고 인사를 하곤 했다. 그 사진 속 아빠는 진한 고동색 버버리 코트를 입고, 아주 커다란 나무 기둥에 기대어 왼쪽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 멋있어서, 나도 나중에 버버리 코트 입고! 커다란 나무들이 있는 나라로 출장도 가고! 마음을 먹고는, 그리고 담배도 피워야 하는지? 는 좀 고민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도 나중에 커서 회사라는 곳을 다니게 되면, 출장에서 돌아올 땐 나도 예쁜 인형들을 기념품으로 나의 미래의 아이들에게 사주어야지 하고 생각을 했다.
[학창 시절]
나는 아빠회사에서 기념으로 나눠주는 티 셔츠는 체육이 들어있는 날, 체육복 대신 윗도리로 입었다. 반 친구들이 내가 입은 티셔츠의 뒤판에 달린 회사 이름을 보고 놀리는 아이도 있었다. 너는 이 회사 소속이냐고? 그렇게 알아봐 주는 친구가 있으면 나는 자랑스러웠다. 아빠가 다니는 회사 이름을 읊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체육복을 입고 내 아빠 회사 이름이 많은 아이들에게 읽히도록 운동장을 종횡무진 뛰어다녔다.
나는 아빠와 일심동체가 되고 싶었다. 학교에 가서도 아빠 생각만 하고 싶었다. 그래서 하루는 곧 퇴근한다고 집으로 전화를 걸어온 아빠에게 주문을 넣었다. "아빠, 집에 올 때, 아빠 회사 이름이 박혀있는 연필이랑, 지우개랑, 책받침을 사다 주세요." 학교 수업시간에도 아빠와 함께이고 싶었다. 그런데, 아빠가 사다준 지우개는 둘리/또치/도우너 그 당시에 유행하는 캐릭터들이었다. 아빠회사 이름이 박혀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빠가 사다 준 것이니까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중학교에 진학을 해서,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반장을 달았다. 스위트한 아빠에게서 하교 후 전화가 왔다. "아빠! 나 반장 됐어!" 그런데 아빠의 화답은 "아휴, 너 공부해야 하는데..." 아빠의 대답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혼란스러웠다. 분명 초등학교 5학년 전학 후 부반장이 되었을 때에는, 정말 축하할 일이라며 나를 문방구에 데려가서 갖고 싶은 거 다 고르라고 했는데! 그래서 골랐던 그때 최고로 유행하던 보라색 흔들 샤프는 아직도 내 마음을 흔들고 있는데! 지금은 부반장도 아닌 반장인데, 왜 지금은 아빠가 축하를 해주지 않는 건지! 그때 실망스러웠던 마음은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는 것 같다.
고등학교 수능 입시 성적을 받고, 놀랍게도 잘 나온 내 점수를 믿지 않던 아빠는, 실물 성적표를 받고는 안도의 숨을 쉬셨다. 그리고는 논술 시험 바로 전날엔 아빠는 시험지에 잘 써질 1.0mm 심이 두꺼운 볼펜과 그리고 영양제를 사 오셨다. (논술 전날 그 영양제를 먹는다고 해서 바로 나의 두뇌에 영양이 돌아서 내가 시험 성적을 잘 받진 않겠지만;;) 논술에 나올법한 예상 문제를 뽑아 주셨고, 그 문제들에 대한 모범 답안을 한 번씩 연습해 보았다. 그리고 나는 원하던 학교에 대기 1등으로 합격을 하였다. (뭐든 1등은 기분이 좋은 것이다.)
아빠는 나 대학 1학년을 마치고 바로 미국 어학연수를 보내주셨다. 이때부터 아빠는 여자도 글로벌하게 일을 해야 하고, 아빠는 나를 장남으로 생각하신다 하셨고, 그리고 여자도 돈을 벌어서 부모님 용돈을 줘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셨다. 나는 이때 그냥 아빠에게 세뇌당했다. '응 나는 꼭 돈을 벌 거야.' '나는 꼭 글로벌한 회사에서 멋지게 일을 할 거야.', '나는 내 돈으로 내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려야지!' 미국땅의 캠퍼스 어학연수 시절은 정말 행복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엄마 아빠로부터의 물리적으로 거리감 있게 떨어져 생활한 다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던 것 같다. 엄마 아빠는 나를 너무 사랑했고, 가끔씩 난 그 사랑에 과호흡이 왔었던 것 같다. 그런 자유를 맛보고, 원 없이 영어 공부도 하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아빠가 바라마지 않던 딸의 직장 생활은 시작이 되고, 내가 입사하던 날, 동네 입구에 플랜카드 붙이고 돼지 잡을 만큼의 기쁨에 넘쳐 아빠는 와인을 마시며 엄마와 덩실덩실 춤을 췄다.
그리고 아빠는 내게 말했다. "이제는 좋은 남자랑 잘 만나서 시집만 잘 가면 돼." (헉;; 다시 과호흡 올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