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코's 단편소설
**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사진 속 장소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며칠 동안 비만 내리다 오늘 드디어 구름이 없어졌다. 비 오는 동안 참고 있던 햇빛이 터지듯, 유난히 뜨겁고 더웠다. 나는 지인과 만날 장소로 가기 위해 걷고 있었다. 하필 그늘도 없어 길이 뜨거웠다. 우중충한 날씨만 보다가 햇빛을 보니 기분이 좋았지만 10월에 이런 더위는 싫었다.
저 멀리 횡단보도 그늘막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그러나 곧 내 발걸음은 다시 느려졌다. 횡단보도 그늘막이 만든 그늘 주변에 많은 비둘기가 모여있었기 때문이다. 비둘기는 그늘에서 햇빛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햇빛 아래에 있었다. 그늘에는 어떤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비둘기는 할머니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할머니를 등지고 다른 방향들을 보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비둘기가 그늘에 있는 할머니를 지키는 보디가드처럼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늘로 걸었다. 비둘기는 나를 보고 적의가 없는걸 느낀 건지 길을 열어줬다. 비둘기가 만든 길을 걸어 그늘막이 만든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비둘기를 한번 쭉 살펴본 후 다시 앞을 바라보셨다. 비둘기는 다시 움직여 보디가드처럼 그늘을 둘러쌌다.
횡단보도 불빛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걸음이 빨라서 할머니를 앞질렀다. 비둘기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다음 횡단보도 신호까지 도착한 후 뒤를 돌아봤다. 저 멀리서 할머니가 걸어오고 계셨다. 그리고 그 뒤로 비둘기가 할머니를 따라 걷고 있었다. 할머니 걸음 속도가 느려서 비둘기도 날지 않고 걷고 있었다. 다시 살펴봐도 할머니는 비둘기 먹이를 들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비둘기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할머니 주변에만 모여있었다.
그때 할머니 왼쪽 멀리에서 전동 킥보드를 탄 한 남자가 오고 있었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그는 폰을 보며 달리고 있었다. 속도를 줄이거나 방향을 바꾸지 않고 있는 걸 보니 할머니를 못 본 것 같았다. 내가 그를 본 것과 동시에 비둘기 여러 마리도 그 남자를 보았다. 곧 비둘기 다섯 마리가 날기 시작했다. 곧장 전동 킥보드를 향해 날아갔다. 비둘기 세 마리는 조금 떨어진 길가에 앉아 날개를 흔들었고, 두 마리는 그의 얼굴 앞으로 날아서 지나갔다. 그는 앞을 지나가는 비둘기에 화들짝 놀라고, 길가에 있는 다른 세 마리의 비둘기를 보고 당황하여 핸들을 급하게 틀었다. 그러다 그는 결국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비둘기는 넘어진 남자를 잠시 바라보고 다시 날아 할머니 주변에 있는 비둘기 무리에 합류했다. 할머니는 넘어진 남자 쪽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횡단보도 신호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투덜거리며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일어났다. 곧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어 할머니와 비둘기 무리는 내 쪽으로 걸어왔다. 넘어졌던 그 남자는 전동 킥보드를 타고 다른 길로 갔다. 나는 그 장면을 멍하니 지켜봤다. 할머니는 내 앞을 태연히 지나가셨다. 따라오던 비둘기 중 몇 마리는 나를 잠깐 바라보았지만 이내 무시하고 계속 할머니 뒤를 따라 걸었다.
다음 횡단보도에서 나와 할머니는 서로 다른 길로 갔다. 신호가 먼저 바뀐 횡단보도로 건너는 할머니와 비둘기를 지켜봤다. 아까 전동 킥보드로 날아갔던 비둘기 중 한 마리가 나를 잠깐 바라봤다. 전동 킥보드를 탄 그 남자처럼 되기 싫으면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는 걸까 아니면 자기가 했던 걸 봤냐며 우쭐해하는 걸까?
비둘기 보디가드를 가진 할머니라니.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 다른 평범한 비둘기를 몇 마리 보았다. 흔한 새들이 오늘따라 조금 다르게 보였다. 아니, 어쩌면 원래부터 그랬는데 내가 몰랐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