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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공상태 Jun 28. 2020

뿌리를 내리다 (씨앗의 소설)

예전의 나, 그리고 지금

예전의 나는,

이미 씨가 뿌려진 땅에 응당 내려야 할 뿌리를 잘 내리지 못했다.


씨가 뿌려진 흙이, 세상에서 가장 비옥한 땅은 아니었지만 뿌리를 내리기에 그리 나쁜 곳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물이나 햇빛이 충분하지 못했냐 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는데 뿌리를 내리는 일이 너무 버겁게만 느껴졌었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억수같이 쏟아진 비는 내 주변의 흙을 쓸어내리기만 한 게 아니라, 나라는 작은 씨앗까지 저만치 떨어진 다른 곳으로 옮겨다 놓았다.


새로 터를 잡게 된 곳에서는 어느 정도 씨를 두텁게 덮어주어야 할 흙이 부족해 태양의 열기가 너무 뜨겁게만 느껴졌다.

계속 이곳에 있다가는, 나라는 작은 씨는 문자 그대로 말라죽어버릴 것만 같았는데 때마침 그때 다시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고 쓸려내려 가는 흙탕물에 섞여 또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진 나는, 이번에는 숨쉬기조차 힘든 진흙 속에 꽉 묻히게 되었다.


알맞은 정도의 흙으로 적당히 두텁게 덮여있었던 맨 처음 그 땅이 너무도 그리웠다. 햇살이 너무 뜨겁지도 않았고, 흙에 물이 너무 많아 숨 막히는 느낌도 그다지 없었던 그곳이 너무도 그리워질 때쯤, 이번에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가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모종삽에 의해 나는 어느 화분 속으로 다시 옮겨지게 되었다.


맨 처음 그 땅 같았지만, 뭔가가 달랐다. 어쩌면 조금은 다른 땅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달라졌기때문일수도 있었는데,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햇살이 너무 뜨겁지도 않았고, 물이 너무 많아 질식할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결심했다. 이곳에 뿌리를 내리자고.


더 이상 고민만 하며 이리저리 쓸려다닐수만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이미 그럴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걸 수도 있었을 거다.

그 역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햇살이란 것은 참 따뜻한 것이구나.

나를 촉촉이 적셔주는 물 덕분에 많은 것들을 견딜 수 있는 거였네.


나는 천천히 말라비틀어져있던 나라는 씨앗을 조금씩 조금씩 소중하게 여기는 법에 대해 연습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 나는 어느새 충분히 뿌리를 내릴 수 있을 만큼의 영양분을 나라는 작은 씨앗 안에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아직, 뿌리가 내려지지는 않았다.

조금 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듯한데, 두려움보다는 설렘 쪽의 무게가 더 크다.


드디어 뿌리가 나오고, 어느덧 잔뿌리들까지 흙속으로 단단히 뻗어나갈 수 있을 때까지, 잘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에게서 돋아나는 첫 뿌리를,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길, 그러한 마음자세를 나는 분명히 가져야만 한다.


그것이, 내가 세상에 온 이유이고,

나라는 작은 씨앗이 여기까지 온 확실한 이유일 테니 말이다.


온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나에게서 돋아나게 될 그 여리고 작은 뿌리를 세상 누구보다 내가 먼저 인정하고 사랑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자고 다짐해본다.


진. 심. 으.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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