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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보경 Apr 24. 2023

생활체육 복싱 우승에 부쳐

지난주 토요일 생활체육 복싱 대회에 나갔다.

나는 내가 복싱이라는 운동을 하게 될 줄 몰랐다.

어쩌다보니 철학을 배우게 됐고 어쩌다보니 철학을 가르치는 스승이 프로 복싱 선수였다.

스승은 종종 삶이나 철학을 복싱에 빗대어 설명하고는 했다.

부끄럽게도 처음엔 그저 안정감을 쫓아서 복싱 체육관을 찾아갔다.

그러지 않으면 불안에 먹혀버릴 것 같았으니까.

동시에 그가 하는 이야기가 무슨 뜻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링 위에 올라 상대방과 서로를 죽일 듯이 주먹질을 해대는 그 느낌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스승은 왜 복싱을 좋아하는지 궁금했다.


처음 복싱을 시작할 때엔 그저 막막했다.

적지 않은 세월간 운동을 해 왔지만 상대방과 합을 맞추어야 하는 운동은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며 자세 연습을 하는 내가 바보처럼 보일 때도 많았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남들에게 내 모습이 멋있게 보이기를 상상하며 섀도우를 했던 때도 더러 있었다.

그러다 관원들과 매스나 스파링을 하게 될 때면 여지없이 뚝딱이가 됐다.

어떻게 때려야 잘 때리는건지 잘 맞는건지 생각하며 연습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상대방을 읽는 감수성도 부족했으니 당연했다.

부끄러웠다.

나는 복싱을 제대로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스승이 봤던 세상을 나도 보고 싶다고 말만 나불댔을 뿐 외롭게 만든건 나였다.


나는 힘이 약했다. 내가 정말 약한 사람이라는 걸 복싱을 하며 절절히 느꼈다.

나는 여자 치고도 힘이 약한 편이다.

온 힘껏 힘을 실어 주먹을 뻗어도 타격감이 없었다. 솜주먹 그 자체였다.

이렇게 약한 내가 복싱을 계속 해도 되는걸까? 하는 회의감도 들었다.

내가 아무리 주먹을 많이 내 봤자 상대방에게는 데미지가 없을 것 같았으니까.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말썽이던 무릎 통증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자세가 잘못된 건지 그 부위가 약한건지 정강이뼈 근처 통증이 점점 심해져갔다.

아픈 부위를 더 의식하게 되니 스파링 할 때 민첩하게 움직여야 할 순간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더 때릴 수 있었는데, 악착같이 주먹 한 번이라도 더 뻗을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몸이 마음에게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고 있음을 느꼈다.

내 주먹이 약해서, 무릎이 약해서, 다리가 약해서 약한게 아니었다.

나의 마음이 약한 거였다.


생활체육대회를 나가 보겠다는 생각은 복싱을 시작하며 어렴풋이 했던 생각이었다.

이렇게 빨리 나가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지금 나갔어야 했던 것 같다.

복싱 덕분에 생활체육대회 덕분에 숨 쉴 수 있었다.

최고로 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내 싸움은 내가 해야만 한다.

링 위에서는 아무도 대신 싸워주지 않는다.


이미 예전에 마음을 먹었으면서 겁이 나서

대회 이야기는 한참 전에 들었음에도 감량을 2주 전에 시작했다.

체육관에 꾸준히 나가긴 했어도 진짜 마음을 다잡은 건 그 때쯤 이었다.

짧은 기간에 많이 빼야 하는 건 처음이었다. 또 직장과 병행하니 쉽지 않았다. 힘이 쭉쭉 빠졌다.

시합 나간다고 스파링을 전보다 자주 하게 됐는데 힘이 없으니 전보다 잘 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약해지지 말라고 스스로를 다그쳤던 것 같다.

어이없게도 스파링 하다 내가 제대로 못해서 쳐맞고선 눈물이 날 때도 있었다.

눈물이 어디서 솟아났는지 나에게 물었는데, 그러면 금세 말랐다.

허접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그 다음날에도 체육관에 가야 했다.

쳐맞더라도 또 스파링을 해야했다.

그래야 부끄러운 내 눈물자국이 조금이라도 지워질 것 같았다.


그런데 대회 날이 다가오면서 정신이 또렷해졌다.

대회 전날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했는데 관장님이 전날이니 무리하지 말라고 하셨다.

마지막까지 체중이 잘 안 빠져서 그날 아침부터 물을 먹지 않았었다.

하루만 물을 안 먹어도 이렇게 고통스러울 수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내 체중을 보더니 여자 선수분이 이 정도면 저녁에 뭐 먹어도 될 것 같다고 귀뜸해 주셨다.

집에 가는 길에 딸기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었는데 내가 먹어본 아이스크림 중에 가장 맛있었다.


시합 당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기 위해 거울 앞에 섰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기가 무서웠다.

분명 두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는데도, 내 시선이 도망가거나 거울 속 내가 도망가는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너를 똑바로 봐. 네 모습을 똑바로 보라고' 를 되뇌었다.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내 싸움은 내가 해내고 싶었다.

후회 남기지 않고 싸우고 오고 싶었다.


상대가 누구일지 얼마나 강할지 수천수만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절대 물러서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링 위에 올라갈 때 상대와 마주보고 섰을때 그 느낌이 기억난다.

나는 상대한테 맞거나 지는게 두려웠던게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낼 수 있는 주먹이 있는데도 포기해 버릴까봐, 한 걸음 더 갈 수 있는데 포기해 버릴까봐, 그래서 또 비겁하게 도망쳐 버릴까봐, 약함 속에 숨어서 비겁하게 합리화 할까봐, 남은 감정의 응어리를 어찌하지 못하고 상대에게 비겁한 방식으로 되돌려 주려 할까봐 그게 겁났던 것이다.

상대가 아니라 나의 약한 모습이 두려웠던 것이다.

1분 30초 2번, 3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온몸의 세포가 불타서 없어져 버리는 것 같은 그 순간에

가장 살아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 느낌을 평생 잊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친구들이 응원을 와 주었다.

나보다 먼저 복싱을 시작해서 크고 작은 도움을 주며 든든하게 의지가 되었던 언니와

알게 모르게 따뜻한 마음으로 이것저것 챙겨주었던 오빠와

정신없이 바쁜 일정에 아르바이트도 빼먹고 응원 피켓까지 만들어 준비해 온 동생과

세심하게 마음써서 그림과 글러브 선물도 해 주고 경기 전후로도 안부를 챙겨준 언니와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에 절절하게 삶을 울궈낸 글을 매일매일 써내고 있는 언니와 동생도 와 주었다.


자신의 시합에서 졌는데도 진심으로 지어 주었던 예쁜 미소.

나를 응원하다가 피부를 쥐어뜯어서 벌겇게 피가 맺혀있던 손가락.

시합이 다 끝나고 열기가 가라앉을때쯤 뿌엥 울음을 터뜨려서 모두가 웃었던 순간.

함께 먹었던 버거킹 햄버거. 눈치 보며 사온 꽃다발.  

진심으로 열의를 다해 지도해 주었던 코치님.

목이 터져라 내 이름을 불러주던 목소리들.


예전이었다면 이 모든 것들이 무거운 짐이 되어 어깨를 짓눌렀을텐데

그래서 그 무게에 깔려 압도되고 움츠러들었을텐데

그래서 약한척 착한척 하며 비겁하게 그들을 방패삼아 숨었을텐데.

누군가 나를 믿어준다는 것이

누군가 나를 응원해준다는 것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맙고 미안했다.

내가 뭐라고 이 사람들이 이렇게 함께 싸워주고 있을까해서.

내가 뭐라고. 내가 얼마나 못난 사람인데 이렇게 목이 터져라 응원해 주고 있을까 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 불러주는 내 이름을 들으며 눈물이 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무게를 지고 싸우고 싶었다.


나는 혼자 싸운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혼자이면서 혼자가 아니었던 것 같다.

여태까지 혼자서 싸워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혼자서 싸우지 못했던 것 같다.


우승을 해서 기뻤다.

그런데 우승을 해서 기뻤던 게 아니라

내가 포기하지 않아서 도망치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내 곁에 있어줘서

나도 언젠가 그 사람들이 자신만의 싸움을 할 때 진심으로 응원해 줄 수 있겠다는 이상한 믿음이 들어서

아주 조금이지만 내가 나를 믿을 수 있게 되어서

그래서 기뻤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프로 복싱 시합에 나간것도 아니고

대단한 일을 해낸것도 아니다.

이겼던 것도 운이 많이 작용했고 코치님의 진심이 담긴 좋은 지도가 가장 컸다.

복싱 실력도 크게 늘지 않은, 아직도 한참 생짜배기 초보다.

그런데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 많은것이 달라진 것 같다.

여전히 불안하고 두렵지만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을 만큼 화끈거리고 도망치고 싶을때도 있지만

나는 이렇게 나인 것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한 걸음씩 걸어갈 것이다.

나인채로 즐겁게 나의 싸움을 해 나갈 것이다.

언젠가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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