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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보경 May 09. 2023

영업의 기술

사랑하지 않는 것은 팔지 못한다

직장에서 영업과 마케팅 직무를 두루 담당하고 있다. 3년차 직장인으로서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배워가고 있지만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것들 중 하나는 이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팔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설득의 3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에토스 (화자의 인품), 파토스 (청중의 듣고자 하는 태도), 로고스 (논리적 근거). 수업 시간때 배웠던 내용을 요즘처럼 많이 생각하게 되는 때는 없는 것 같다. 요새 업계가 불황이라 판매 실적이 좋지 않고, 위에서는 계속 쪼아대고, 근무 인력은 부족해서 일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그런 만큼 어떻게든 고객을 설득해서 제품을 팔아야만 하는 압박이 커져가고 있다. 연차도 조금 찼기도 하고 코로나 시국도 끝났으니 고객들을 직접 대면해야 할 일이 잦아졌다. 큰 세미나에서 행사를 직접 진행하거나 결정권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피티를 해야 할 일도 많아지고 있다. 그럴 때마다 늘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이다.


간단한 질문이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어떻게 설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우리 업계는 워낙 보수적인 업계이고 사양산업이라 그런지 제품력보다는 관계로 파는 경우가 파다하다. 관계라 함은 소위 말하면 '어디에서 가장 콩고물을 많이 챙겨주는가?' 이다. 이는 B2B 사업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지만 유독 우리 업계는 평균 이상으로 뒷돈 장사가 압도적이다. 더 이상 커지지 않는 파이를 여러 기업에서 나눠 먹다보니, 내가 배부르게 먹으면 저 사람은 굶어 죽어야 한다. 어느 업계든 다 좁다지만 특히 축산업계는 더욱 그런 편이다. 축산업이라는 산업 자체가 국민과 정부의 미움을 사는 실정이고 해외 의존도가 높은 사료업계 특성상 발전 가능성이 매우 미미하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유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이 업계 종사자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 바닥이 먹고 살기엔 참 좋은 바닥이라고들 이야기 한다. 급여는 짜더라도 오래오래 헤쳐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이 6-70이 되도록 회사에서 높은 자리 꿰차고 떵떵거리고 다니는 할배들이 수두룩 빽빽하다. 그만큼 업계가 좁고 변화가 적은 곳이 축산 업계다. 오늘 어디 회사의 누가 한 말이 내일이면 소문이 도는 지경이니 발빠른 말이 천리 간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라는 화두 하나를 놓고 여러가지 고민들을 하게 됐다. 일을 하면서 설득의 성공 여부에는 정말 많은 요소들이 작용한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어찌보면 가장 먼저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인품, 즉 '에토스'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내가 실제로 가장 많이 느끼는 부분이다. 내가 학부와 대학원을 축산으로 인지도가 있는 대학에서 축산을 전공했고, 회사에서 기술영업과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고, 외관상 연차도 찬 만큼 나름대로 신뢰도가 있다고 생각해서일까 나의 백그라운드를 알고 있는 청중들은 내가 하는 말에 조금 더 귀 기울이려는 경향을 보이는 편이다. 나의 출신이나 전반적인 평판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내가 하는 말에 대해서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들으려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한국사회 특성상 그리고 우리 업계 특성상 '어리고' '여성'인 나로서는 조금 어려운 면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을 넘어서진 못해도 상쇄할만큼의 신변은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만큼 어디에 가서 발표를 할 때 반응을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백그라운드가 고객을 설득하는데에 있어 적지 않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두번째는 청중의 태도, 즉 '파토스‘이다. 피티를 준비하다 보면 우리 회사에서 주장하는 논거들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서 스토리텔링 할 수 있게 된다. 청중이 누구인지에 따라, 지식 수준이 얼만큼 되는지에 따라 이야기를 다르게 풀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예를 들어, 청중이 R&D 부서 소속의 박사라면 기술적인 측면에 좀 더 집중하고 가격적인 측면도 함께 고려해야 하고, 영업이나 마케팅이라면 가격적인 측면을 최우선으로 하되 제품의 특장점을 몇가지로 요약하여 임팩트 있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하고, 구매부라면 가격적인 측면과 함께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고려해야 하고 (예외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구매쪽은 결정권이 별로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품질관리부서라면 품질관리적인 측면에서 얼만큼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지 고려해야 하고, 등록 관련 업무를 하는 부서라면 얼만큼 법리상으로 명확하게 서류를 제시할 수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말을 들으러 온 목적이 무엇인지에 따라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도는 천차만별로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 세미나가 혹은 미팅이 형식적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청중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면 위에서 시켜서 내키지 않지만 그냥 듣는 척만 한다던지, 아니면 반대로 결정권자는 써 줄 의향이 없는데 단순히 접대 받을 목적으로 (믿기지 않겠지만 제품을 써 줄 의향이 없으면서 밥한끼 혹은 골프 라운딩 하루 접대 받으려고 을인 영업사원을 만나자고 하는 갑인 거래처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다) 미팅을 잡는다던지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들에는 내가 아무리 논리적인 근거로 설득력있게 발표를 한다고 해도 시간만 낭비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마지막으로 영업에서 중요한 부분은 논리적 근거인 '로고스'이다. 우리 회사 제품은 가격이 비싸서 그렇지 전세계 판매 점유율로 보자면 꽤 높은 편이다. 객관적인 수치로 평가했을 때에도 전세계 사료첨가제 업체 중 상위 5위 안에는 드는 나름대로 덩치가 꽤나 큰 조직이다. 그런만큼 제품력이 나쁘지 않은 편이고 그것만으로도 이미 신뢰성에 있어서 먹고 들어가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신뢰성을 획득하기까지는 수많은 논리적 근거들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예를 들면, 활성 비타민 D3 제품은 제품의 효능과 그를 뒷받침할만한 로직이 있고 그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실제로 도출된 결과가 신뢰도의 증거로 충분히 제시 가능하다. 활성 비타민 D3 제품은 다수의 논문을 통해 입증된 작용기전과 동물실험 결과 (효능과 로직)와, 사료 첨가제로서는 드물게 긴 29년에 달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고 유럽연합 EFSA, 미국 FDA, 일본 MAFF에서 까다로운 절차를 걸쳐 등록이 되었다는 점 (결과)을 통해 신뢰성을 가진다.


그런데 에토스와 파토스와 로고스를 모두 가지고 있음에도 나는 우리 회사 제품을 제대로 팔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뭔가 열심히 하고 있는데 판매로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었고, 판매로 이어진다고 해도 뿌듯하지가 않았다. 실적이 늘어나도 자랑스럽지 않고 오히려 부끄럽고 떳떳하지 못한 감정이 들었다. 열심히 해도 도적들의 작당모의에 가담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었다.


나는 우리 회사 제품이 정말 훌륭하다고 믿지 않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료첨가제라는 것 자체가 정말 더 좋은 사료를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는지, 더 좋은 사료를 만드는 것이 옳은 것인지, 옳다면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로 인해 이득을 취하는 주체는 누구인지, 그 주체가 이득을 취함으로써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살만한 곳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설득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설득되지 못했으니 믿지 못했던 것이다.


설득을 위한 3가지 요소인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가 필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그 3가지 요소를 가지려면 내가 그것이 옳다고 믿을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믿음으로부터 에토스가 나오고, 파토스를 읽을 수 있고, 로고스를 주조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영업'하고자 하는 것을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닌 가슴으로 믿을 수 있는가?  


 




얼마 전 새로 알게 된 사람에게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고 이야기 하다가, 그 친구가 던진 말 한마디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네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지만 그렇게 살고 싶다는 이야기구나?"


그 말을 듣는데 불쾌하고 기분이 나빴다.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나를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위 말하는 발작버튼이 눌렸달까.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지만 도달 할 수있다고. 내가 배운 철학은 앎으로만 아는 철학이 아니라 실제 삶으로 살아내는 철학이라고 한참을 떠들어 댔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끄럽고 민망스러웠다. 사실 그 친구는 나를 비난하거나 조롱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을수도 있다. 문자 그대로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지만 도달하고자 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고 받아들일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왜 그랬을까?


나 스스로도 그 삶이 옳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철학적으로 사는 삶이 옳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름 아닌 '에토스'라고 한다. 내가 얼만큼 내가 설득하고자 하는 주장대로 살고 있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에토스'는 믿음이 없으면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다. 삶은 참 야박하다. 내가 직장에서 스스로도 설득되지 않는 제품을 팔아 보겠다고 아등바등 하고 있는 시간만큼, 내가 옳다고 믿는다던 삶을 저버리고, 그만큼 스스로에게 설득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절대적인 양은 때로는 중요하지 않지만 때로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기도 하다. 그것이 가치를 가지는 어떤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때로는 그와 보내는 시간의 양이 혹은 그에게 투자하는 돈의 액수가 사랑의 척도가 될 수 있듯이.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시간과 공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내가 보내는 시간과 공간이 어디에 지배적으로 머무르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성찰할 수 있다면 내 믿음이 어디에 무게를 두고 있는지 있는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요즘 나는 하루 8시간 이상을 직장에 투자하고 있었고 그만큼 나는 내가 믿는다고 했던 그 삶을 그만큼 믿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원하는 곳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그에 합당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나 그 산등성이가 높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려면, 특히나 그 물살이 세면 셀수록 그에 걸맞는 근력과 지구력이 필요하다. 나는 나의 직장 생활이 근력과 지구력을 향상 시키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새 나의 마음과 행적을 돌아보니 그렇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내가 그동안 나의 운동 패턴에서도 오래도록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와 같았다. 나는 발목이 약하고 불안정하며 무릎 슬개건에 만성적인 통증을 달고 살아왔다. 그로인해 고관절이 뻣뻣해지고 골반이 닫혀서 골반의 전방경사가 심화되고 또 연쇄적으로 아래 허리가 굳고 척추의 유연성이 감소하고 그로 인해 어깨의 가동 범위가 협소해져서 다양한 운동을 할 때에도 공통적으로 같은 부위에 반복해서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다. 문제가 있는 부분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했어야 했는데, 그래야 진정으로 근력과 지구력 그리고 협응 능력이 향상될텐데 나는 그런 '진짜' 운동을 게을리 했다. 실제로 재활이나 기능 향상에 관한 논의에서 빠지지 않는 부분은 일상의 변화이다. 예를 들면, 무릎이 말썽이라면 한걸음 걸을 때에도 심혈을 기울여 발을 디디는 모양이나 사용되는 관절과 근육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든지와 같은 능동적인 변화 같은 것 말이다. 일상의 변화는 능동성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능동적인 변화는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파생된 믿음은 너로부터 쏘아져서 나에게 반사되어서 나온다. 능동적 변화와 더 가까운 것은 너가 아니라 나이다. 나부터 잘해야 한다는 말은 이 관점에서도 성립되는 것이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던 날 나는 왜 부끄러웠을까? 가짜 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능동적인 변화를 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자 베르그손은 '행동'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행동'에는 '진짜' 행동이 있고 '가짜' 행동이 있다. '진짜' 행동은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마음으로부터 나온 행동은 주체를 잃지 않는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가짜' 행동은 머리로부터 나온다. 머리로부터 나온 행동은 주체를 상실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전자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라면 후자는 종교적 믿음이다. 전자는 사랑을 먼저 주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후자는 사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다. 전자가 혼을 담은 구라라면 후자는 혼을 담지 않은 구라이다.


타자가 개입되는 그 어떤 움직임은 다 마찬가지다. 복싱도 주짓수도 레슬링도 접촉즉흥도 모두 대화의 일종이다. 그리고 진정한 대화는 상대방이 쏘는 광선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와 그 믿음을 내가 얼마나 잘 반사해 낼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의존과 의지의 차이는 거기에 있다. 나와 너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얼만큼 분배할 것인지 말이다. 너에게 과한 무게를 지우지 않으려면 나에게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나에게 두는 무게중심은 내가 나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에 달렸다. 내가 나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는 역설적으로 내가 너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에 달렸다. 나에게 과한 무게를 두면 너와 대화할 수 없으므로 너에게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너에게 두는 무게중심은 너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에 달렸다. 내가 너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는 역설적으로 내가 나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에 달렸다. 청자의 태도 (파토스)와 얼마나 세련되고 효율적이게 설득할 수 있는가 (로고스)는 믿음을 뿌리로 둔 에토스 뒤에 온다. 믿음은 곧 사랑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만 믿는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나는 '진짜' 행동을 하고 있지 않았다. '진짜'를 '가짜'로 덮어 씌워 왔던 삶이라 '진짜'가 무엇인지 몰랐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종교적이고 거래적인 사랑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설득하고자 했던 것은 팔고자 하는 상품이 아니었다. 그건 선물이었다. 내가 정말 좋다고 믿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팔지는 않으니까. 직장에서의 설득과 사랑하는 사람의 설득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직장에서 아무리 많이 팔아도 기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야 조금 더 알 것 같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선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선물을 선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이유는,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삶을 예쁜 선물로 내놓지 못했던 이유는 그것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선물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선물을 다시 선물해 줄 준비가 되었다. 준비는 되는게 아니라 하는 것이니까. 삶은 닥쳐오는 것이고 중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들의 고민을 듣는다. 그럴 때마다 '나도 아직 내 삶을 잘 살고 있지 않은데 이런 말을 해 주어도 될까?' 라는 의심이 끊임없이 든다. 내가 하는 말이 크게 무게를 가지지 않을지라도 내가 잘못 저은 손짓에 지구 저 반대편에서 대형참사가 일어날수도 있다. 어디 그뿐인가. 내 안의 악마는 '실제로' 해악을 끼친다는 것을 나는 생생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러니 말 한마디 한 마디 할 때 내가 나의 마음에 취해 이야기 하는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하게 된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날이면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해 준 말들이 더 많은 것 같아서 후회하는 경우가 여전히 압도적으로 많다. 그래서일까 요새 감정적으로 쳐지는 날들이 계속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방 안에만 틀어박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나의 에토스를 자라게 해주지 못하니까. 에토스가 생기지 않으면 설득할 수 없으니까.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는것이 힘들다. 분명 그들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슬픔이 나에게 건너와 작은 슬픔이 되더라도, 티끌모아 태산이 된 슬픔이 가끔 나를 압도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기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옳다고 믿는 기쁜 삶의 방식으로 조금씩 나아갔으면 좋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설득하고자 하는 상대방의 로고스나 파토스가 설득하려는 사람의 에토스가 자란 키 만큼 자라지 못한 경우가 많다. 파토스는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부분이니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은 에토스와 로고스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로고스도 에토스 못지 않게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꼭 필요한 이야기라면 때로는 절벽 위에 선 심정으로 창으로 찌르듯이 던져 보아야 하는 것 같다. 그 도약 때문에 그 사람과 헤어지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나는 그렇지 못해서 너무 많은 인연들을 떠나 보냈다. 그 도약하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사람에 대한 나의 사랑의 역량과 크기라는 것을 알기에 서글프지는 않다. 다만 누군가 나보다 더 고통스럽고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면 나의 유약한 에토스가 파괴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하고 싶다. 내가 믿는 삶이 옳은 삶이라고. 악착같이 기뻐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언 해주는 것을 망설이고 있을 때에도 내가 떳떳하지 못할까봐 두렵더라도 말해주고 싶다. 자신이 굳건히 믿는 바를 말해 주어야 할 때는 그 관계가 파괴될 것을 무릅 쓰고서라도 온 힘을 다해  말해주어야 한다고.


사랑하는 사람이 기쁜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참 아프다. 아무리 말로 설득하려고 해도 설득되지 않을 때 얼마나 절망적일까. 그래서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을 보는 것도 힘들고 아프다. 그런데 달리 방법이 없다. 내가 그 삶이 옳다고 믿는지 돌아볼 것. 만약 정말 옳다고 믿는다면 그 삶을 묵묵히 살아낼 것. 그리고 너의 삶에 설득되려고 할 것. 그리고 설득됨으로써 설득하려고 할 것.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삶이 옳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를 필요 없다. 다시 돌아가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내가 그 삶이 정말 옳다고 믿는지를 자문해야 한다. 내가 회사 제품을 제대로 팔지 못했던 이유 중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 제품이 정말 좋은 것인지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회사 제품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득에는 분명히 시차가 있다. 어떤 사람이 지금 그에게 설득되었어도 그는 그 사람에게 나중에 설득될수도 있다. 그 아픔을 내가 이겨낼 수 있기를, 그리고 그와 그녀가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란다. 상대방이 선물을 상품으로 오해하더라도 웃으며 건네줄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랑해"라는 말을 "고객님 사랑합니다"로 오해하더라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더 상처 받고 아프더라도 기꺼이 상처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그 혹은 그녀가 그 상처로 아파하고 있을 때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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