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아르바이트생들이 별로 친절하지 않더라"
그 날은 친구가 오랜만에 동창 친구들을 만나고 온 날이었다. 동창들은 어느새 가장으로써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진 아버지가 되었다고 했다. 다행히 다들 일이 잘 풀렸는지, 각자의 직장에서 한자리씩 하며 떳떳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 말을 이어야할지 고민했다. 처음엔 친구의 말이 조금 아팠다. 그러나 친구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아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무래도 요즘 사람들이 그런 편이지? 나도 아르바이트 할 때 그닥 친절하지 않게 되더라. 최저시급 받고 감정까지 팔고 싶진 않더라고"
"그런가. 그러면 이해가 가네"
나의 말에 친구가 조금 민망해하며 말했다. 미안한 마음이 담긴, 조금 둥글어진 어조였다. 그러고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최저시급' 이라는 단어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 차라리 '법정시급' 이라던지, 그런 말이 더 좋지 않을까. '최저시급' 이라고 하니까 너무 없어 보이잖아"
"그러려면 최저시급을 올려 주어야지. 요즘 밥값이 한 끼에 기본 만원인데."
친구의 말에 나도 모르게 뾰족한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그러면 최저시급이 얼마 정도 되어야할까?"
어제 친구와 대화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최저임금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얼만큼 변화해왔는지 찾아보았다. 과거의 나는 최저임금이 얼마인지 사실 크게 관심이 없었다. 나의 정체성 역시 노동자였으면서 고용주에 가까운 사고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웠다.
자료를 찾아서 글을 쓰려고 정리를 하다가 멈칫했다. 나는 친구가 했던 마지막 질문, 최저시급이 얼마정도 되어야 적절할지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보고 친구와 다시 대화를 해보려고 했나보다. 나는 외면하고 싶은 진짜 문제를 맞닥뜨리면 사회적인 담론으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그 친구와 하고 싶었던 대화가 '최저임금을 얼마로 설정해야 하는가' 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썼던 글을 모두 지우고 내 감정에 솔직해 지기로 했다.
그 친구가 했던 말들이 서운했다. 그 친구는 나와 가깝고 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 중 한 명이었다. 그 친구와 함께 밥을 먹거나 여행을 갈때면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고의 것들을 해주고 싶었다. 돈을 아끼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친구는 물건을 구매하는 데에만 돈을 소비해 온 것 같았다. 나는 친구가 해보지 못했던 경험들을 돈으로 사 주고 싶었다. 그 시간동안 친구와 함께 깔깔 웃고 우리끼리만 웃긴 장난을 주고받고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고 산책을 할 때면 시간이 멈춘 것처럼 행복했다. 그 친구가 나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건 나의 오만한 착각이었다.
퇴사를 한 뒤 조금 남아있는 퇴직금과 아르바이트 그리고 일용직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자 돈이 친구에게 줄 수 있는 유용함 중 굉장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예전보다 많은 것을 해줄수는 없어도 나는 친구에게 맛있는것을 사주고 싶었고 친구가 사고 싶은 것들을 사주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알뜰히 아끼며 할 수 있는 노동을 했다. 예전만큼 풍족하게 해주지 못하고, 또 예전보다 친구에게 신세를 질 때도 많아졌다. 그러면서 나는 내 마음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가 사준 밥 한끼 물건 하나에 담긴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했다. 친구에게 무언가 금전적인 것을 해줄때면 예전만큼 선뜻 나서서 해주지 못하는 내 모습이 당황스럽고 낯설었다. 그만큼 너에 대한 마음이 식은것인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친구에게 서운했던 마음을 모조리 적어서 편지를 준 적이 있었다. 퇴사를 막 했을 무렵이었다. 그 때의 내 마음은 불안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동안 외면해왔던 약한 고리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그 무렵 쌓여왔던 친구와의 불화가 최고조에 달했던 것이었다. 나는 그 친구와의 관계를 잃고 싶지 않았다. 내가 더 성숙하고 어른이었더라면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고 또 나의 마음을 성찰해 볼 수 있었을텐데 그때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서운한 마음이 눈덩이처럼 커져서 친구가 미운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유치하고 미성숙한걸 알면서, 그동안 합리화하고 아름답게 포장했던 마음을 버리고 서운했던 마음을 모조리 털어놓고 말았다.
나는 그 친구에게 쓰는 돈이라면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친구와 함께 보았던 공연, 전시, 여행, 숙소, 렌트 등 기타 여러가지 무형의 서비스들을 구매할 때면 대부분 내가 했으므로 친구는 정확한 금액에 대해 알지 못했다. 친구는 예약을 하거나 여행을 계획하거나 일정을 짜는것을 별로 해본적이 없었고 수동적인 편이었다. 음식점에 가거나 차를 마시거나 할 때에도 종종 친구가 지갑을 꺼내려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이건 내가 멋대로 한 오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월급을 받아서 다 어디에 쓰냐며, 장난스레 나를 타박하는 말을 할 때면 서운했다. 그런 것들을 꾸미지 않고 하나하나 편지에 써서 주었다. 편지를 주고 나서도 내가 너무 찌질하고 찐따 같다고 생각되어서 자괴감이 들었다.
그로부터 몇달 뒤, 친구와 사소한 문제로 다퉜던 적이 있었다. 그 날 친구는 자신에게 무언가 해줘 놓고서 생색낼거면 하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마음을 송곳으로 찔린 듯이 아팠다. 너무 서운했다. 며칠 뒤 친구에게 내 딴에는 최선을 다해서 너에게 잘해준 것인데 네가 그렇게 말하면 서운하다고 말했다. 네가 나에게 진심을 담아 사준 선물을 가지고 네가 생색낸다고 하면 너도 서운하지 않겠냐고 하니 친구는 미안해했다. 그런데 내 마음에는 여전히 오래전부터 지속된 찜찜함이 남아있었다.
최근 최저시급에 대한 친구와의 대화를 하고 다시금 찜찜한 마음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친구에게 또다시 서운했던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나보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받은 최저시급으로 너와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시간을 보내는데 네가 그렇게 말을 하면 나는 서운해. 내가 기꺼운 마음으로 너에게 쓰는 시간과 돈과 마음을 네가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카페 아르바이트를 12시부터 2시까지, 점심시간 피크를 치다보면 커피를 만들기만 해도 벅차. 그 때 손님에게 친절함을 바라는건 최저시급 10,030원을 받으며 일하는 나에게 존엄을 버리라는 요구야. 2시간이라는 시간은 고용주가 주휴수당을 주지 않기 위해, 필요한 시간에 가장 효율적으로 사람을 쓰기 위해 부품처럼 나를 끼워넣는다는 느낌을 줘. 점장은 당일 바빠서 연장근무를 요청하더라도 30분 이상을 요구하지 않아. 물류센터에서 일하다보면 부상을 입은 어깨와 발목과 손목이 아파와. 그런 나에게 10,030원의 최저시급을 법정시급으로 불러야 한다는 너의 말은 나에게 상처가 돼.
나는 그 친구가 왜 그런 마음을 가지는지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친구 역시 자영업자이며, 혼자 영업장을 꾸려나가느라 매일매일 고생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고용할 경우 지출하는 금액중에 인건비가 굉장히 많은 비율을 차지할 것이다. 그러니 친구는 당연히 고용주의 입장에서 최저임금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만약 내가 고용주였어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아마 나는 쪼잔하고 이기적이라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기 싫어서 착한 사람인 척 했을 것이다. 친구는 나의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내 마음이 어떤지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누구나 겪어보지 않은 일은 공감하기 어렵다. 세상 일은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는 걸 이제 조금은 알아가고 있다.
친구는 나에게 해준 것들이 많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 지금도 유용하게 쓰고 있는 친구의 선물들이 많다. 또 친구는 언제나 나에게 밥을 선뜻 사주었으며 내가 여행을 가거나 친구와 만남이 있으면 재밌게 놀라며 돈을 보내준 적도 많다. 돈 뿐만 아니라 나에게 써준 마음들도 많았다. 그런데 서운한 마음이 들때면 내가 해준것들만 잔뜩 떠올라서 자기 연민의 감정이 차오르곤 했다. 상대방도 내가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서 서운했을때가 많았을텐데 그런 친구의 마음을 생각하고 싶지 않고 내 마음만 보이곤 했다. 나는 그런 내 모습이 정말 싫었나보다.
얼마 전 철학 수업에서 경제학에서 말하는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에 대해 들었다.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을 철학적으로 규명하면 "모든 만족은 필연적으로 불만족을 내포한다" 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 느꼈던 만족을 체감하려면 점점 더 많은 만족이 필연적으로 필요하다.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친구가 써 줬던 편지 한장에도 사랑받는다고 느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갈수록 친구가 나에게 주는 사랑이 점점 늘어나기만을 바랐다. 그래서 친구가 나에게 해준 것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제 그 정도의 사랑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의 반대편에 '한계 비효용 체감의 법칙'이 있다. 이를 철학적으로 규명하면 "모든 고통은 필연적으로 만족을 내포한다" 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받는 입장으로만 보면 사랑은 받아도 받아도 끝이 없는 밑빠진 독 같은 이미지이다. 영원히 채워지지 않아서 갈증이 나고 절망적이어서 자기연민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이것이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이다. 그러나 사랑을 주는 입장에서 한계 비효용 체감의 법칙으로 바라보면 상황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역전된다.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고통을 감내하다가도 어느 순간 상대방의 작은 미소를 보여주면 그것이 그리도 기쁜 것이다. 사랑은 고통이라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면 오히려 만족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 방법은 내가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나를 구원하고 너를 기쁘게 할 수 있는 방법이다.
퇴사를 하기 전까지 나는 "사랑하는 사람한테 전재산을 줄 수 있냐"는 물음 앞에 진지하게 서 본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돈에 초연한 척 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 잔고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쓴 돈과 네가 쓴 돈을 저울질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네가 나에게 준 마음보다 내가 너에게 준 마음을 훨씬 더 크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가 이태껏 받았던 사랑들을 소중히 여겨본 적이 없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나의 고통은 당연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생각해왔던 나의 모습이 얼마나 가짜였고 위선적이며 허영심 가득했는지 알았다.
위선을 덜어낸만큼의 진심을 온 마음을 다해 담아도, 그것이 전해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아간다. 노력과 애씀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아간다. 그건 그저 사랑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기초 체력일 뿐이었다. 나는 너에게 실제로 유용함을 주지 못했다는 걸 알아간다. 네 삶을 기쁘게 바꾸어 줄만큼 나의 영향력과 역량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간다. 그 사실이 아프고 두렵지만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당장은 드러난 통장 바닥만큼 드러나버린 나의 밑바닥 민낯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아야겠다. 형편없고 못생겨보이는 맨얼굴이더라도 내 진짜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다. 나는 이제 나에게 찾아오는 작은 사랑 하나라도 헛되이 놓치지 않고 싶다.
편하고 쉬운 길보다 어렵고 힘든 길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 한계 '비'효용 체감의 법칙에 대하여
https://youtu.be/HZm70PXDVFk?si=81-vZd3GMVaQIGfa
출처: 철학흥신소 유튜브 https://www.youtube.com/@philosophyagency/featu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