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 왜 순수함과 선을 동일한 것이라 착각할까
서울에서 일하면서 무척이나 쓰고 싶었던 주제인' 순수'에 관하여 이제야 쓰기 시작한다. 사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순수함을 서서히 버리지 못하면 좋지 않다는 생각은 확고했지만 이것을 말로 그리고 글로 정리해 나가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 생각안에서도 새로 정돈해내기도 어려운 주제이기도 하고 나도 때에 따라 미묘하게 생각이 뒤틀리기도 했었기 때문에 지금에야 글로 써보려 시도하고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 정리하고 수정하게 될 주제라서 지금 쓰는 글이 확고해졌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수 있다.
예전 어느 웹툰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 있다.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들이 한 아이를 묶어두고 여러 심한 고문으로 죽기 직전까지 이르게 했고, 잡힌 아이들을 관찰하던 정신과 의사가 그 아이들의 눈을 보며 '저렇게 순수한 눈을 한 아이들이 있다니'라는 말을 했었다. 그 옆에서 화들짝 놀란 다른 관계자는 저렇게 잔인한 짓을 한 아이들이 어디가 순수하냐며 되물었지만 '순수하기에 악함이 더 빨리 더 쉽게 물들 수 있다'라고 말했다. 어릴 적 햄스터를 기르던 친척동생이 그 햄스터를 천진난만하게 괴롭히던 것을 떠올리며 저 말에 크게 공감했다. 내가 순수함을 다른 시점으로 보기 시작한 첫 계기가 됐다.
사람들은 순수함을 깨끗함이란 의미를 넘어 평화롭고 아름답고 착한 이미지와 연결시킨다. 하지만 순수함이란 '무'의 상태를 뜻하는 것이지 '선'을 뜻하는 건 아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말과 선하다는 건 완전히 다른 말이다. 이 초점으로 생각한다면 순수함은 백색의 도화지를 말하며, 빨간 물감, 파란 색연필, 회색의 파스텔 등으로 이 순수한 도화지를 꾸며나가는 과정을 사회성을 만들어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폭력, 배려, 질투, 지식, 성취, 식욕, 섹스 관념, 두려움, 고통, 도와주고 싶은 마음 등 여러 백색의 도화지에 그려낼 수 있고 어떤 것을 얼마큼 그려내야에 따라 그 사람의 인성이 만들어질 수 있다. 아니면 무엇이든 그려내는 것을 꺼려해 채우지 않다 보면 성인이 돼서도 무지한 사람이 될 수 있겠지. 또 아니면 지식만을 그려내다 보면 감정에 대한 관념이 없는 '성인아이'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나는 나이가 들어서도 순수한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면 귀여워 보일 수도 있지만 결국 같이 지내다 보면 손도 많이 가고 알려줘야 할 것도 많고 무언가를 잘못해도 순수하다는 이유로 봐줘야 하는 경우가 더러 생긴다. 그리고 성인의 세계에선 악한 상황을 더 많이 겪게 될 수도 있어서 도화지에 악한 것들이 더 빨리 물들 가능성이 있다. 아직 도화지가 다 채워지지 않은 20살 21살 남자들이 군대를 다녀오면 더 발전해서 나오는 사람보다 몇 개월 차이로 가지는 얄팍한 권력욕이나 게으름, 언어적 행동적인 폭력성 등 이상한 것만 배워서 나오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보면 금방 이해할 것이다.
또한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선함을 그려낸 사람도 내가 기피하는 사람 중 하나다.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해주고 배려해주는 것은 좋지만 어설픈 방식으로 배려를 해주다 보면 오히려 상대를 더 곤란하게 만들게 되지만, 도와준 사람은 자신이 도와줬다는 자신의 선함에 도취해버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PC주의자'들이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선한 말들을 쏟아내지만 고려해야 할 수많은 것들을 무시한 채 그 한 문장만으로 상대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직 순수함이 남아있는 선함이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 중 하나는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 순수함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중 그 도와주고 싶은 마음만큼은 순수함에서 비롯된 감정 아니냐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도 잠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상대의 고통과 상대의 아픔을 아는 건 도화지가 채워진 이후의 일이다. 아픔과 불편함을 겪어본 이후에야 상대의 아픔과 불편함을 이해할 수 있다. 공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 공감이란 건 내 도화지에 그려진 색깔과 질감이 상대의 도화지에 어느 정도까지 비슷하게 그려져 있는지에 따라 공감력이 높아진다.
이런 말들을 했을 때 순수한 것이 선하다 옳다 착하다 평화롭다 라는 인식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사람은 세상의 아름다움과 따뜻함이 깨진 것 같은 절망스러운 속내를 보여준다. 내가 결국 이 주제로 글을 쓰면서 하고 싶었던 결론은 순수한 우리 마음에 더 옳고, 더 똑똑하고, 더 따뜻하고, 더 선한 것들을 채워나가자는 것이다. "너희들이 바라는 아름다운 세상 따윈 없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아름답고 따뜻하게 만들어가는 건 원초적인 순수함이 아닌 우리의 성의와 우리의 교육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자연은 꾸며진 자연이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산에 울타리도 깔고 계단도 만들고 길도 터서 우리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지 실제의 자연은 어떠한 위협이 생길지 어떠한 위험이 생길지 모르는 두려운 것이다.
한 가지 조언하자면 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이해되는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세상 살기가 좀 더 편해진다. '사람은 선한 존재이기 때문에 나에게 하는 행동도 선할 것이다'라는 생각은 나중에 큰 감정의 소모로 이어질 수 있다. 반면 '상대가 착하던 나쁘던 나에게 이렇게 해줄 이유는 없어 내가 더 확실히 행동하고 만들어가야 해'라는 생각은 상대에 대한 의존적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내가 내 것을 만들어 나가는 것에 더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상대의 행동에 대해 더 빠른 이해가 된다. 그러다 기대 없이 도움을 받으면 정말로 고마워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된다.
나는 선한 의도와 그에 맞춰 성숙함과 현명함을 갖춘 순수하지 않은 자신의 발전을 생각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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