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이제 Dec 12. 2022

남편의 옛날 노트

내가 아닌 과거의 누군가를 위해 쓰인 페이지

남편의 옛날 노트에서 전 연인에게 할애된 페이지를 발견할 때 느끼는 이 작고 묘한 슬픔 같은 게 있다. 실제 구절을 내 눈으로 읽지도 않았고 바로 남편이 내 눈앞에서 황급히 뜯어서 버렸는데도 말이다. 그러한 페이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안에는 얕지만 격한 파장이 일어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때 나 말고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팩트가 주는 애잔함 같은 것.


"내가 이런 것에 아무 의미 안 두는 거 알잖아.
옛날 노트는 이해 좀 해줘~!
에잇, 이사 오기 전에 다 불태우고 왔어야 하는데."



그의 무심한 멘트는 야속하기만 하다.


남편은 맺고 끊음이 분명한 사람이라 옛 인연을 질질 끌고 온 적도 없고, 끝은 언제나 정말로 진짜로 '끝'을 의미했다고 했다. 첫사랑이 누구였냐고 물어도 과거는 기억에 담아두지 않으며 자기에게 별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전형적인 ENTP 인간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 주변 여자 사람 친구들은 백퍼 거짓말일 거라고 손사래 치지만 진짜다...)


이미 일반쓰레기로 분류되어 소각장으로 향하고 있을, 아무 의미 없는 노트 한 장이 이토록 불안한 건 내가 그렇지 않은 인간이어서일까? 나는 과거에 많은 의미부여를 하는 사람이라서. 나는 단순 귀찮음 때문이 아니라 일부러 안 지우고 있었던 블로그 포스팅이나 과거사진도 많다. 그 시절의 나를 기억하고 싶어서, 그때만 존재했던 그 어떤 아름다움을 가끔 회상하고 싶어서 말이다. 나야말로 맺고 끊음이 확실하지 못했던 사람이어서 이럴 때면 애꿎은 감정적 벌을 받는 걸까 싶기도 하다.


누군지도 모르는, 2017년의 남편 애인이 자꾸 머릿속에 상상으로 그려지면서 괴롭다. "그 사람한테는 지금 나한테 쏟는 만큼의 열정은 없었지?" "그 정도 열정이 있었음 결혼했겠지(미소)." 뭐야, 이런 여유로운 대응마저 약 올라. 하지만 건강한 사람이라면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부정적인 감정에 잠식당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지론을 떠올려야지.


그나저나 왜 때문에 오늘의 해는 벌써 지고 월요일 꿀휴가는 벌써 지나가버리고 있는 것인가.

작가의 이전글 12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