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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제 Feb 21. 2020

제도권의 구성원은 남성 권력이 승인한다

명예 남성으로 산다는 것

제도권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나는 자아가 자주 분열된다.



30년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나를 제도권에 남을 수 있게 하는 건 언제나 남성 권력이었다. 유학 갈 때 그곳과 연이 닿을 수 있도록 추천서를 제공한 것도 모두 남자 선생님들이었고, 이직을 고민할 때도 새로운 직장과의 커넥션을 지닌 건 언제나 기존 권력 체계의 상위에 있는 남자 상사들이다. 이 세계에는 압도적으로 남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제도권에 남으려면 남성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노력해야 했다. 사회가 마련한 구태의연한 틀에 집착하지 않아 '(포스트?)모던걸' 같은 신선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동시에 여성성이라는 최후의 카드는 항상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 그들이 인정하는 규범에 너무 어긋나 버리면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공간에서 도태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언제 그들의 도움이 필요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놓은 자식처럼 구는 건 도박이었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이러한 행동들은 정확하게 '명예 남성'의 정의와 부합한다. 계층 사다리를 올라야 한다는 욕망을 어릴 때부터 품어온 나는 꽤 악바리 같은 면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절반은 명예 남성으로 살고 있다.  


반면 내가 발을 담그고 있는 다양한 재야(?) 공동체들에서 나는 이 사회 여성 권력의 좌절과 희망을 동시에 목격한다. 내가 아는 여자 선생님들, 언니들, 여자 친구들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초인적인 힘으로 서로를 돕고 있다. 여성들의 품앗이에는 아무런 대가도 없을 때가 많다. 그들은 보상 없이 자신의 돈과 시간을 써서 회의를 하고, 글을 쓰고, 발언을 한다. 나는 일을 하면서도 업무 스케줄을 조정해 성매매 현장 아웃리치를 다니고, 원고를 투고하고, 내가 기부하는 각종 단체 모임에 참석한다.


여성들은 안 그래도 없는 자원을 어떻게든 나누고자 잠을 줄이거나 끼니를 거르거나 해서 삶의 일부를 할애한다. 몸이 모자라고 힘들어도 에너지를 나누는 모습은 안타깝기도 하지만 눈물이 날 만큼 감동적일 때도 많다. 그렇게 한동안 버티다가 결국 말없이 쓰러지고 사라지는 여성들을 볼 때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감당할 수 있는 무게 그 이상을 짊어온 대가를 이들이 다시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다.


한 마디로 나는 한쪽 세계에선 내내 가면을 쓰고 거짓말을 하며, 다른 한쪽에서는 고통을 분담하고 얼마 남지 않은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이러한 괴리와 자아분열 상황을 태연하게 관리할 만큼 충분한 독기를 품지 못하면, 제도권 내에 내가 두 발을 딛고 설 자리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끄러져 추락하면 그 낙차를 감당하지 못할 만큼 아직 스스로가 단단하지 못하다는 걸 안다. 그러면서도 내 가치와 정체성, 감수성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건 껍데기에 불과한 삶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다소 에너지가 들더라도 핵심을 그만둘 수는 없다.



이 모든 건 내 헛된 욕망 때문일까, 아니면 이 사회의 그릇된 체제 때문일까. 그러나 분명한 건, 언젠가 이 질서를 전복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성공해서 힘을 얻어야 한다는 모순된 바람이 여전히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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