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소는 차리지 않았다. 형제도 없고 부모님의 가족들도 모두 돌아가신 터라, 엄마를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나의 가족과 몇몇 요양원 식구들만이 함께했다.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의 장례 때는 정신없이 바빴다. 친척들과 성당 교우들이 와서 기도해 주셨고, 발인부터 화장, 납골당까지 동행해 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 감염 두려움과 인구 구조 변화로 1일장, 2일장, 무빈소 장례가 늘어났다.
입관 때는 남편과 두 아들도 할머니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며 작별했다. 보통은 입관 후 다음 날 발인하지만, 화장터 부족으로 하루를 더 기다려 4일장이 되었다.
화장 전날 새벽, 꿈을 꿨다. 엄마와 즐겁게 산을 오르는데, 나만 자꾸 미끄러지고 오르지를 못했다. 그때 엄마가 내 볼을 꼬집으며 환하게 웃었고, 나는 깨어났다. 생생한 꿈이었는데, 다음 날 그 의미를 알게 됐다. 엄마가 안식할 곳이 산 언덕배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같이 갈 수 없는 길이었다는 것을.
화장터로 가는 길, 대형버스에는 엄마와 우리 가족 넷, 그리고 기사분뿐이었다. 텅 빈 좌석들. 침울하지 않고 그저 조용했다. 마지막 동행, 나는 담담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2시간의 화장 시간 동안 우리는 식당에서 요기를 하며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엄마 이름이 불리고, 한 줌의 재가 된 엄마를 납골함에 모셨다. 그리고 '꽃빛 공원'으로 향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잠든 그곳에 엄마의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모든 게 끝났다는 신호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허무하지도 후련하지도 않은 평온함이 가득했다. 무빈소 장례는 시끌벅적하지 않고 조용했지만, 어느 하나 생략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엄마를 보내드렸다.
천주교 신자인 나는 한 달간의 연미사를 신청했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평안하다.
엄마는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지켜보시며 잘했다고 하실 것이다.
무빈소 장례였지만, 결코 나쁘지 않았다. 앞으로 이런 장례 문화가 더 많아지리라.
오명옥 젬마 여사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