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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날 단상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필요한 세상에 살고 있다

by 나비

개학날이다.

전날 관사로 갈까 했더니 남편이 말렸다.
“아침에 막내 혼자 학교 가야 되는데, 엄마가 집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혹시 늦잠 잘 수도 있잖아.”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나 편하자고 관사에 가버리면 아들 아침도 챙겨주지 않는 모진 엄마 소리 들을 것 같아 미안했다. 아이가 혼자 일어나 등교 준비를 한다면 휑한 집이 더 외로울 것 같았다.


알람을 맞춰놔도 5분이 10분 되고, 10분이 15분으로 이어진다. 나이 들면 아침잠이 없어진다던데, 그것도 케바케인가 보다. 8시간을 잤지만 부족하다. 몸뚱이는 축축 늘어진 고무줄 같다.


1시간 동안 출근 준비가 가능할까. 서둘러 일어나 세수를 한다. 전날 샤워를 했으니 아침은 패스다. 990원짜리 팩을 얼굴에 붙이고 10분 동안 신속하게 준비한다.


커피는 빼놓을 수 없다. 커피메이커에 갈아둔 원두 한 숟갈을 넣고 전원을 켠다. 호밀빵을 굽는다. 남편 몫까지 굽고 달걀 프라이를 넣어 네 등분한다. 토마토 네 개도 덤으로 접시에 올려둔다. 갑상선 약 한 알을 식전에 먹는다. 살짝 식힌 커피 한 잔, 구운 빵 한 조각, 방울토마토 세 알로 아침을 끝낸다.


자고 있는 아이를 깨운다. 다시 화장대로 돌아가 간단히 화장을 한다. 6시에 기상해 마무리까지 40분.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아들도 일어나 샤워를 한다. 아침은 먹지 않겠다 하기에 두유만 올려놓고 “잘 다녀와” 인사를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니 7시 10분. 아침 산책을 나가는 아주머니가 강아지를 꼭 안고 있었다. 아기를 달래듯 ‘쉿’ 하고 속삭인다.


차 시동을 켠다. 오늘도 1시간가량 오디오북을 들을 참이다. 이제 막 듣기 시작한 책은 김주혜 작가의 『작은 땅의 야수들』 출퇴근 2시간이 소요되니 주로 소설을 선택한다. 이번 책은 작년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 완독 하지 못했던 책. 이번엔 꼭 완독 하고 싶었다. 보통 장편 오디오북은 15시간 정도. 『작은 땅의 야수들』은 20시간이라 2주쯤 걸릴 듯하다. 성우의 목소리도 몰입을 돕는다. 다행히 이 책은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를 읽었던, 내가 좋아하는 성우가 맡았다.


학교에 도착하니 주차장에는 관사 선생님들 차만 있었다. 교실에 올라가니 마을버스를 타고 온 아이 둘이 먼저 와 있었다. 여자아이는 머리카락을 하얗게 탈색했는데 꽤 예뻤다. 큰아들이 탈색했을 때 하루 종일 미용실에 있었던 기억이 떠올라 물으니, 역시 10시간 가까이 걸렸다고 한다. 금액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모아둔 용돈 20만 원으로 했다니 놀라웠다. 남자아이도 키가 훌쩍 자라고 파마까지 했는데 잘 어울렸다. 두 아이 모두 학교에 나온 게 즐거운 듯 계속 웃고 있었다. 교실 바닥과 책걸상에 먼지가 쌓여 함께 청소를 했다. 아이들은 씩씩하게 청소기를 돌리고, 나는 곰팡이 핀 쓰레기를 버렸다. 얼룩 묻은 의자도 물티슈로 닦았다.


아이들이 하나둘 들어온다. 서로 달라진 모습에 “꺄악!” 돌고래 소리를 지르며 웃는다. 한 아이는 동글동글한 안경을 쓰고 와서 눈길을 끌었다. 박사님 같다, 공부 잘하는 중학생 같다며 웃는다. 그 아이는 방학 숙제도 가장 잘해 온 아이라 친구들이 엄지를 치켜세운다.


여름방학 중 가장 즐거웠던 일은 단연 워터파크였다. 서로 다른 곳에 갔어도 즐거움은 같았는지, 얘기할 때마다 몸을 들썩이며 그 순간을 떠올렸다. 음식 얘기도 빠지지 않았다. 떡볶이가 단연 1위, 라면도 빠질 수 없다며 종류를 늘어놓았다.


이번 주는 5교시만 한다는 소식에 아이들 얼굴이 환해졌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선생님께 하트를 날리는 아이는 알림장에도 하트 뿅 뿅을 그려 넣었다. 나는 “참 잘했어요!” 하트 도장을 꾹 찍어주고 손가락 하트를 날렸다.


하교 후에도 남은 아이가 있었다. 보충 공부를 하겠다며 쉬는 시간 없이 2시 50분까지 끝내고 싶다고 했다. 함께 시간을 맞추고 수학 문제를 풀었다. 알 듯 말 듯한 부분을 짚어주니 아쉬움과 즐거움이 교차하는 표정이 스쳤다. 빨간 볼펜으로 동그라미가 그어질 때마다 아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정작 나는 눈에 하품 눈물이 차올라 민망했다. 약속한 시간까지 공부를 마친 아이는 만족한 듯 인사하고 교실을 나갔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오늘은 개학일이자 수요일. 3시 30분에는 체육 연수가 있다. 예전 같으면 피곤하다는 핑계로 엎드렸을 텐데, 어제 건강검진 이후 마음을 달리 먹었다. 일주일에 두 번은 땀나는 운동, 한 번은 근력 운동을 하자고 다짐했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체육관으로 갔다. 선생님들이 이미 배구를 하고 있었다. 나도 함께 했다. 2~3년 사이 오른팔과 왼팔에 번갈아 오십견이 와 운동을 거의 못 했지만, 이제는 두 팔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몸은 예전만 못하지만, 오늘은 움직였다는 사실에 의미를 둔다.


오늘 내가 잘한 일은, 해야 할 일에 진심을 다했다는 것. 그 마음을 쏟다 보니, 나에게 주어진 것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깨닫는다. 그 주어진 것들이, 때론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그리고 오늘도 누군가에게는 힘든 하루였을지도 모른다.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가슴 아픈 소식들은 이제 남의 일이 아니다. 누군가의 아픔이 전해진다는 건, 우리가 그 아픔을 함께 나눌수록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날 밤 12월의 어둠 속, 어머니가 태어난 곳에서 TV로 어머니의 사고 뉴스를 보던 그 짧은 순간, 우리 세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세상이 우리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우리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이 아픔을 극복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보여 주었다. -당신에게 끝까지 다정하기로 했다(폴커 키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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