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오랜만에 내려온 딸이 부엌 냉동실을 열고 이리저리 뒤적이더니 고춧가루가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꺼내 들었다.
“엄마, 이거 뭐예요?”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던 나는 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딸의 손에 든 봉지를 보자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아, 그거... 예전에 외할머니가 만들어서 넣어놨던 고춧가루야.”
“엄청 오래됐네. 벌써 9년이나 지난 거네!”
딸의 말을 듣고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아홉 해가 흘렀다. 그동안 저 고춧가루 비닐봉지를 쳐다보지 않았다. 아니 외면했다. 알 수 없는 묵직함이 뜨거움과 함께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딸은 봉지를 들고 어쩌겠냐는 듯 내 눈치를 살폈다.
“외할머니 생각에 놔둔 거면 다시 넣어 놓을까요?”
“아니야, 그냥 버리자. 너무 오래돼서 상했을 거야.”
나는 애써 외면하며 다시 뉴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마음은 여전히 냉장고 문 옆에 서 있는 딸 곁에 머물러 있었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봉지 정리 소리가 아득한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주는 듯했다.
그날 밤, 라면을 먹은 탓인지 짠맛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갈증에 잠이 깨어 비몽사몽 일어나 안경을 찾으려 했지만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그냥 방문을 열었다. 거실 건너편 부엌에 희미한 전등이 켜져 있었다.
'내가 불을 끄지 않았나? 그럴 리가 없는데... 아니면 유정이가 켜놓고 잊어버렸나?'
차가운 거실 바닥이 발바닥에 닿을 때마다 몸에 한기가 스며들었다. 그때였다. 작은 방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또 부엌 불 안 껐냐? 전기세 나간다고 그렇게 말해도 안 들어.”
순간 내 손에 들려 있던 유리컵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쨍그랑!”
이어 그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야! 그걸 놓으면 어떡해! 발가락 다칠 뻔했잖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곳에 엄마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젊은 엄마가. 눈을 끔뻑이며 나는 두 손으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눈을 다시 떠보니 여전히 엄마였다. 내 앞에 엎드려 유리 조각을 치우는 엄마의 숱 많은 검정 머리가 어깨에 흩어졌고, 꽃무늬 반 팔 녹색 옷 등은 연이어 떨어지는 내 눈물로 얼룩졌다.
“너 또 우냐? 운다고 해결될 일이면 얼마나 좋겠어. 그만 울고 어서 들어가 자.”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선명한 광경이었다. 엄마는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셨다. 희뿌연 물안개 속에서 엄마의 모습은 점점 흐려졌다. 나는 목소리가 잠겨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았다.
화장실 앞에서 한참을 울먹이던 나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쥐어짜 올렸다.
“어... 엄... 마? 엉엉!”
나는 내 울음을 귀로 들으며 깨어나기 싫어 발버둥 쳤다. 그러나 곧 딸이 내 몸을 세차게 흔들었다.
"엄마, 일어나. 엄마, 엄마!"
나는 간신히 눈을 떴다. 아, 꿈이네. 그럼 그렇지. 고춧가루가 엄마를 불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