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유서

by 루카

아무래도 이러다가 나는 곧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 지나가는 차도에 뛰어들고 싶어 지는 날들이, 베란다로 몸을 던지는 상상을 하는 날들이 길어지자 갑자기 내가 사라지면 당황할 사람들을 위해 유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에 내 걱정이 아니라 남을 걱정하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세상에 이상하지 않은 일은 없다. 우연이 아닌 일을 없는 법이니까.


어쨌든 나는 머릿속으로 유서를 그려냈다. 가장 처음 했던 것은 남편에 대한 원망이었다. 내가 아픈 것이 그 사람 때문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결혼해서 불행해졌다고 믿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음에도. 그래서 원망을 쏟아 냈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죽는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불행했고, 너 때문에 망가졌다.’ 이런 내용을 시작으로 주변에 대한 내가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누구 때문인지, 다 주변 사람들 때문이라는 질책과 다른 사람에게로 나의 병을 넘기고 죄책감을 가지길 바라면서 난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엄마도 미웠다. 여태 엄마 눈치만 보고 살았다고 생각했다. 결국은 전부 내 선택이었으면서 회피를 한 것이다. 내가 죽는 건 내 탓이 아니라 내 환경 탓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다가 정말 밉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측은해지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나 같은 사람을 만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내가 있어서 그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부모님에게 죄송했다. 이렇게 아픈 것도, 제대로 된 자랑이 되지 못한 것도, 그리고 이렇게 먼저 떠나는 것도. 엄마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나 같은 딸을 애지중지 길렀을 엄마, 미안해요. 나 사실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그냥 못난 딸을 이만큼 키워주느라 고생하셨어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쓰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특히 종이에 꾹꾹 엄마, 고생이 많았다고 쓰는 데 마음이 울렁이며 멍든 것처럼 아파서, 더 잘하지 못한 미안함에 엉엉 울었다. 글자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아 눌러서 썼다. 이제는 내가 없을 테니까, 나중에 내가 후회하지 않도록 온 마음을 다 표현하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펜을 눌러썼다. 나중에는 종이가 구멍 날 정도로 힘을 줘서 손이 아팠다. 하지만 그 구멍도 마음을 다 비워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쓰다 보니 다시 미웠던 마음에 미안함이 계속 싹텄다.


“내가 이렇게 된 건 엄마 탓이 아니야, 그동안 살게 해 줘서 고마워. 엄마가 있어서 그래도 내가 이만큼 살았어.”


엄마에게도 그런 마음을 남겼다. 내가 아프면 항상 본인이 뭘 잘못했을지, 뭘 해야 할지 생각하시는 엄마였으므로 죄책감은 없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하니 남편을 평생 원망할 정도로 미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또 그렇게 썼다. 내가 미안하다고. 나 같은 여자 만나서 고생 많이 했다고. 당신도 얼마나 힘이 들었겠냐고.


“내가 이렇게 죽는 건 절대, 당신 탓이 아니야. 나 챙기느라 고생 많이 했어. 미안해.”


그렇게 썼다. 내가 아픈 건 당신 탓이 아니니까 자책하지 말고 우리 딸 좀 부탁한다고 쓰면서 그를 용서하기로 했다. 마지막까지 미움을 품고 가는 것은 미련한 짓이니까. 미워하면서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딸에게 남기는 말을 적었다.


“엄마가 없어도 너는 살아야 해.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해서 미안해. 더 오래 지켜보지 못해서 미안해.”


나를 무척이나 따르고 좋아하는 딸의 웃는 얼굴이 그려졌다. 그 아이가 커서 엄마를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마음을 유서에 눌러 담았다.


결국 유서의 내용은 처량하게도 내 안에 나를 향한 원망과 미움이었다. 결국 나는 누구에 의해, 어떤 상황에 의해 죽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미운 나를 질책하다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진 것뿐이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내 탓이 가장 크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내가 잘못된 길을 가는 건 결국 모두 내 탓이라고.


죽음을 선택하는 건 내가 아픈 탓이겠지만 그런 상황을 만들고 선택한 것은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서를 쓴다는 것이 나에게는 그런,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행동의 방향을 달리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내가 왜 이렇게 죽는지에 대해 알고 죽는다는 것은 확실히 기분이 나았다. 남들은 병으로 사고로 죽는데 스스로 죽으면서 이유도 없이 죽는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싶었는데 말이다.


이렇게 유서를 써 봤으니 나는 사람들이 하는 주변 사람을 생각하라는 말이 우울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너무 잘 안다. 주변에 죄를 짓는다는 말은 하나도 도움이 되질 않는다.


‘주변이 뭐, 나만 없으면 더 잘 살 걸? 나 같은 거.’


이런 생각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말보다는, 그냥, 가만히 손을 잡아주는 것이 백번은 낫다.


어쨌든 이렇게 죽음에 다가가고 있을 때는 남들의 말도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내 말과 생각과 행동 속에 담긴 스스로에 대한 미움은 잘 읽히지 않는다. 실제로 그걸 알게 되는 과정도 무척 오래 걸렸는데. 나에게는 그게 유서였다. 거기에는 온통, 주변 사람들이 나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까 봐 걱정이어서 그걸 말리는 내용뿐이었다. 죽음이 눈 앞에 있는 것은 나였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제발 나 때문에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 유서는 다 쓰지 못하고 버렸다.


너무 슬펐고 너무 아파서.


그런 걸 남기는 것조차 미안해서.


그렇게 멍울 위에 눈물을 펑펑 쏟고 나서 결국 나는 그 낮에 실행하려던 모든 일을 멈췄다. 이렇게 편지로도 남기지 못할 마음이 너무 많이 남아서.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지만 그 죽음 앞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표현해야 할 말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없어서.


그날도 평소처럼 해는 뜨고 졌으며 날은 맑았고 아이는 어린이 집에 다녀왔고 남편은 회사에 출퇴근을 했다. 입 밖으로 한 번도 꺼내지 않은 그 유서는 마치 유서는 없었던 일처럼 바뀌었고 일상은 그대로 일상이 되었다.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한 치 앞도 모르면서 그렇게 미워하며 살았던 걸까. 주변 사람들을, 그리고 나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리고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