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상대에게 기대가 생긴다. 주변의 사람들이 갑자기 우울증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게 될 거라는 착각이다. 그래서 결국 실망하고 서운해한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신의 일 외에는 관심이 없다.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집에서 책만 보지 말고 나가.”
‘이 사람 우울증에 대해 하나도 모르네.’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조언이라고 하지만 진짜로 아픈 나는 대번에 그 사람이 우울증에 대한 지식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주변의 사람뿐 아니라 가장 가까이 있는 남편도 모른다. 아무리 우울증이니 조울증이니 떠들어봐야 남들처럼 아무것도 모른다.
“왜 이겨낼 의지가 없어?”
그런 의지 타령을 몇 번이나 나에게 반복한다.
“아, 의지는 있는데 그 의지가 또 제 의지대로 되는 건 아니라.”
수백 번 말해도 소용이 없다.
“이건 의지 문제가 아니고 뇌와 호르몬 등등의 문제로서 뇌질환입니다.”
수없이 그런 말을 포교하듯 외치고 다녔지만 결국 남편도 마지막까지 그 말을 놓지 않았다.
“왜 계속 아프려고 해.”
한심하다는 듯 말에 짜증이 섞인 남편의 말을 들으며 나라고 아프려고 아프겠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싸움밖에 안될 거 같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세상에 아프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특별히 목적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몸을 해치는 일, 아프게 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게 의지대로 안 되는 병인데 왜 병이라고 생각해주지 않는 것일까?
“저는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게 아닙니다. 저는 우울하고 싶고 죽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요. 누군 몰라서 이러고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화내고 싶다. 내가 우울하고 싶어서 우울한 것이면 우울하고 싶지 않을 때는 우울하지 않아야 되는 거 아닐까? 그런데 나는 이 상황이 지겹고 벗어나고 싶은데도 계속 우울에 젖어 있다. 운동도 하고 재밌는 일도 찾아봤는데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을, 남들처럼 기분을 다시 끌어올릴 수 없다는 것을 왜 몰라주는 것일까. 암 환자한테 누워서 쉬라고 하면서도 우울증 환자한테는 왜 그런 말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의지 타령하면서 내가 낫기를 바랄 거면, 병증을 공부하고 와서 대책을 세워줘야지 대충 생각대로 말하고 아픈 것도 내 탓이라며 죄책감만 지워준다. 차라리 좀 같이 나가주든가, 집을 비워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왜 모르는지. 우울증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만 깨닫게 된다. 텔레비전에서 아무리 우울증이 보편화된 질병임을 강조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병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설명을 해도 듣지를 않으니, 당연한지도 모른다. 우울증에 대해 알고 예방하거나 나으려는 노력은 나 말고는 아무도 안 하는 것 같다.
물론 아픈 사람이 자신에게 집중하므로 내가 우울증에 대해서는 더 많이 알기는 한다. 나으려고 책도 많이 읽었고 인터넷에서 자료도 많이 찾아보고, 같은 환자들의 증세와 약들을 비교하면서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정도로 공부를 했다. 우울증에 대한 정보라면 귀가 번쩍 뜨여서는 공부하고, 그 정보에 의지해 나중에는 의사가 처방해준 약까지 다시 인터넷을 뒤지며 공부도 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제자리에 서있을 힘을 기르고 있는 나에게 초치는 말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스트레스를 털어버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왜 그런 생각을 해?”
그런 말들이 너무나 쉬웠고 약해진 나에게는 상처였다. 그런데 한 집에 살고 있는 남편까지 내 병증에 관심이 없었고 무심한 소리만 했으니, 그런 말들이 더 나를 힘들고 지치게 한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신랑이 몸살에 걸렸다. 짜증이 났고, 귀찮았다.
“왜 아프고 그래?”
챙겨주면서도 자기 몸 하나 관리 못하는 것이 보기 싫었다.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사람은 여유가 없으면 주변을 돌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보니 약간, 새로운 생각이 들었다. 남편도 여유가 없어서 나에게 상처를 주는지도 모르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남편은 생활을 위해 나가서 돈을 번다. 나는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집안일을 한다. 누가 더 힘들고 누가 더 어려운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 둘 다 힘들다는 것이다. 남편은 직업상 집중을 해서 정신노동이 많은 데다가 시댁의 농사일도 거들어야 한다. 물로 나도 따라가지만 오롯이 그를 생각했을 때, 일은 전적으로 남편이 한다. 몸살이 나는 것도 당연했고 그에게는 부인을 돌볼 여유가 없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으니 내가 하는 말이 한귀에서 다른 귀로 흘러 나가는 것이다.
나 또한 누군가를 돌보는 것에 더 이상 짜낼 정신력이 없다. 아이를 케어하고 내 마음을 붙드는 일에 온 신경이 써지는 상태에서 집안일은 별개로 엉망이지만 조금이라도 해야 하고. 그래서 남편이 아파서 내가 신경 써야 할 일이 늘었을 때, 여유도 없으니 짜증이 난 것이다. 물론 엄마나 아빠는 아프면 안 된다는 말이 있을 만큼 힘이 든 부분도 있다. 하지만 부부로 만나서 한 집에서 함께 사는 동안에 서로의 건강을 챙겨줄 정도의 마음의 여유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나마 내가 우울하거나 힘든 걸 제일 몰랐으면 하는 딸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니며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물론 자신이 심심하다거나 놀아달라는 말을 하지만 옆에 가만히 동영상을 보면서 엄마를 관찰한다. 아이의 세상에는 엄마가 전부이고 엄마를 사랑하고 엄마를 관찰할 시간과 능력이 충분히 있어서 지금은 가능한 일이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니 남편이 측은해졌다. 그러면서 여유가 없는 마음을 조금 비우기로 했다. 내가 비우지 않으니 남편을 걱정할 만한 여유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비우면 남편에게 아프냐며 조금 더 살갑게 물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것이 일방적으로 내 쪽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길 바란다. 남편도 조금 여유롭게, 내가 아플 때 위안할 수 있는 공간을 항상 비워두면 좋겠다. 이것은 일밖에 모르는 남편과 조금씩 고쳐가며 동행하는 과정에 넣어야 할 과제였다. 최소한 아플 때 상대가 쉴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마음 정도의 심심한 여유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그것이 없으면 서로의 아픔을 외면하고 무너뜨리는 일에 무뎌지게 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