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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Oct 24. 2019

재수생 아들의 연애를 간절히 바라는 아빠의 마음

제발 연애 좀 해!

우리 부부가 아들에게 생물학적 유전자를 잘못 배송했다. 배달 사고다. 그래서 아들에게 겸연쩍을 때가 많다. 왜 이상한 것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지 못내 미안하다.


우리 부부는 키가 크다. 그런데 아들은 엄마보다 키가 작다. 나는 곱슬머리가 약하게 컬링 되어 아침이 편하다. 그런데 아들은 곱슬머리가 두피를 향하는 극심한 곱슬이다. 중학생이 된 후 항상 스트레이트 파마를 한다. 아들은 여드름이나 피부 트러블이 많다. 난 피부가 깨끗한데 엄마가 아들에게 못된 것을 물려줬다. 다리가 짧은 나와 엉덩이가 큰 엄마 집안을 닮아, 아들의 하체는 저주받은 짜리몽땅이다. 게다가 나의 비염, 엄마의 입냄새. 정말 아들에게 미안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아들은 여자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괜스레, 여자애들과는 잘 안 맞아, 라는 말로 대신했다. 재수생 아들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으면 나는 바란다. 뜨겁게 바보처럼 연애하길 바란다. 이성에게 느끼는 사랑만큼 뜨거운 것이 없고, 자기를 성숙시키는 교육도 없다. 나는 재수생 아들이 미친 연애에 빠졌으면 바란다.


아침 이른 일기예보를 듣고 우산을 챙겨갔다. 아내를 만난 지 석 달 되던 달이었다. 비가 심하지 않게 내렸고 둘이 게탕에 소주로 아이스브레이킹을 시도했다. 말이 석 달이지 사실 두 번째 만남 이어서다. 그때 나이가 23살. 아들보다 딱 3살 많았다.


소주가 어색함을 잠시 밀어낸 즈음. 우리는 2차 가자, 라며 길거리를 헤맸다. 둘이 각자 우산을 써서 둘의 거리를 멀찍이 띄어놓았다.


우산 접고 이리 와.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 자기 우산을 접고 내 우산 아래로 들어왔다. 내 어깨에 그녀가 어깨를 기댔다. 우린 키가 별 차이 없다. 한 팔을 뻗어 아내의 어깨를 손으로 감쌌다. 어깨 위로 떨어지는 빗물이 내 손등을 고 내렸다. 우린 몇 걸음 가지 못해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홍대 길거리에서 검고 큰 우산 아래, 십여분이나 서로를 삼켰다.


그로부터 우리 연애 행각은 더욱 과감해졌다. 원래 남의 시선을 가리지 않는 내 성격이 아내의 과감함과 궁합이 잘 맞아서다. 술집이나 커피숍에서 쫓겨난 적이 몇 번이다. 둘 다 퉁퉁부은 입술에 침을 바르며 다른 술집을 찾아가 또다시 쫓겨날 연애 행각을 벌였다.


아내를 만나기 전 여러 여자 친구를 사귀었지만, 아내처럼 미친 연애를 하지 않았다. 한 번은 아내에게 샤넬 립스틱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때는 새빨간 샤넬 립스틱이 여자 친구 선물로 한창 인기였다. 지방에 있던 나를 만나러 아내가 2시간 고속버스를 타고 왔다. 기다리는 동안 샤넬이 생각났다. 지방 백화점이어서 그렇다는데, 샤넬 립스틱은 없었다. 헤어지는데 서울까지 2시간을 보내게 할 수 없었다.


원래 아내는 막차를 타고 서울에 갔다. 그날 오후 늦은 시각. 나와 아내는 서울 강남 고속버스터미널로 갔다. 근처 백화점에는 샤넬 빨간색 립스틱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내는 친구가 받았다는 이야기를 새겨듣고 샤넬 립스틱을 사주러 서울까지 온 나에게 감동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피어오르는 뭉클한 사랑에 행복해했다. 그리고 야속하게 어두워지는 밤을 원망했다.


결혼한 지 23년. 난 이제 더 이상 아내 말에 민감하지 않다. 아내가 너다섯번 말해야 핵심만 기억날 뿐, 자세한 시간이나 장소는 잊어버린다.


오늘 어디 가자고 했는데 몇 시에 어디였지?



넌 내 말을 뭘로 듣니? 아내에게 수없이 듣는 말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내의 입술에 무감각하다. 아내도 그렇고, 우리는 남매처럼 지낸다. 불가촉 남매. 가족이 되었다.


하지만 아내의 과거는 내 인생의 베아트리체이고, 내 인생의 헬레나이다. 그리고 아내의 과거는 영원한 나의 여자 친구다. 그리고 그날들을 떠올리면, 내가 제대로 그리고 원 없이 살았구나,라고 웃음 짓는다.


그래서 나는 재수생 아들이 진한 연애를 했으면 좋겠다. 지치고 좌절에 피폐해진 자존감을 살리고 자신의 심장이 뜨겁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면 좋겠다. 제발 연애해라.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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