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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Nov 06. 2019

내가 건드려선 안 될 것을 건드렸나 봐, 아베의 후회

[사장은 아무나 하나요?]

도대체 이것들을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은 봐 줄만 한데, 그래도 예전에 우리 집 머슴으로 살던 것들이!'


이런 격세지감을 느낄 때마다 현실이 너무 싫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 세상이 달라졌다 해도, 예전 우리 할아버지 집에서 머슴살던 것들이 지금 나에게 친구처럼 굴다니. 너무 억울하고 미쳐 팔짝 뛸 노릇이다. 성질 같아선 주종의 관계를 다시 한번 살벌하게 새겨주고 싶다. 다시는 주인 앞에서 해맑게 친구인 척 하지 못하도록.


어릴 때만 해도 할아버지가 살아 있어서였는지, 어린 나 앞에서도 눈을 내려 깔았다. 거지로 살더라 집을 나가 직접 살아 보라면서, 할아버지가 엽전 몇 닢을 던져줬다. 개처럼 엎드려 고마워했다.


어르신, 저희 어르신, 평생을 두고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던져 준 엽전을 들고 종놈 패거리 중에 작고 앙칼진 자가 머을 어귀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 같이 부랑하던 종들을 쥐 잡듯 하면서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가소롭고 어이없었다. 없는 것들이 설친다고 달라지나? 얼른 가서 '종들은 죽었다 깨도 주인의 발치도 오지 못한다' 라는 진리를 일러주고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나를 말렸다.


버러지들은 저렇게 발버둥 치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
그래야 주인이 얼마나 위대한지 느끼고 결국엔 다시 머리를 조아린단다.



아하, 할아버지의 현명함은 따라갈 수 없다. "그래 종놈들, 한번 해 볼 때까지 해 봐라."


을 어귀 딱딱한 땅 울이 척박하던 그 동네를 바라보며 비웃었다. 할아버지가 종놈들의 아비의 아비들을 꼬셔서 엽전 몇 닢을 나눠줬다. 그리고 모조리 종으로 삼았다. 종을 다룰 때는 항상 가장 야비한 자를 우두머리로 삼아 그 야비한 자가 전체 종들을 움직이고 욕먹게 하면 된다, 할아버지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한 세대를 지나 종들은 새끼를 낳았고 그 자식들이 또 종자를 낳았다.


할아버지가 큰 사업을 무리하게 벌이셨다가 알짜 가게와 전답을 호적수였던 코부리 영감에게 뺏겼다. 코부리 영감이 할아버지가 기거하던 저택만 남겨두는 조건으로, 다시는 장사에 손대지 못하도록 약속받았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예전에 벌어둔 돈과 저택 곳간에 쌓아뒀던 쌀가마니로 몰래 이자놀이를 하면서 다시 저택 살림을 살찌웠다.


그러다 코부리 영감이 어느 날 찾아와 말했다. 우리집 종들이 코부리 영감이 할아버지에게 뺏은 전답에 농사를 대신 지어주기로 했다면서, 종들을 풀어주고 종들이 살만한 집을 짓도록 그동안 일한 대가를 지불하라고 윽박질렀다. 할아버지는 그나마 이자놀이마저 못할까 전전긍긍하다가 우리집 종들을 엽전 몇 닢과 함께 놓아주었다. 실제로 할아버지 집에서 종들이 일한 노임을 계산하면 어처구니없는 숫자가 나온다.


종들에게 무슨 일삯이야, 그냥 대충 쳐 주면 돼.


할아버지의 죽는 곡소리에 귀찮은 듯 코부리 영감이 '대충 얼마큼만 쥐어 주라'고 귀띔했다. 나는 저 종놈들이 정말 내 눈에 보이는 게 너무 싫다. 나와 같은 하늘 아래 산다는 자체가 싫다.



우리 할아버지는 왜 종들을 남겨 둬서, 이러는 거야.
그냥 저 동네 콧수염 할아버지처럼 야밤에 종놈이란 것들은 싹 땅에 묻어버리지.





어릴 적 호시절을 생각하니 다시 속이 쓰리고 신물이 올라온다. 종놈들끼리 수십 년을 싸우더니 어느 날 종놈들의 자식들이 서울에 올라가 나보다 더 좋은 학교를 나왔다. 그리고 다시 고향에 내려와서는 죽어라고 공장을 짓고 땅을 사들이더니 이제는 우리 집 앞마당까지 땅을 사들였다. 그리고 종들은 이 도시의 10번째 부자가 되었다. 나는 세 번째 부잣집인데 금수저라서 할아버지 돈으로 유지하고 있다. 저것들은 흙수저인데 기분이 이상하다. 왠지 모를 패배감이 드는게 이상하다. 말이 열 번째지 지들이 돈을 벌다 보니 씀씀이는 내가 따라갈 수가 없다.


이것들은 값비싼 명품 옷을 입고 입으로는 예츠의 시를 읊는다. 그리고 클래식을 틀어놓고선 전축과 오디오를 지들 공장에서 만들어 쓴다. 나도 사고 싶을 정도로 예쁘고 고급스럽다. 하지만 종놈들이 만든 걸 주인인 내가 돈 주고 살 수 없다. 그냥 뺏어오거나 지들이 상납하면 몰라도 말이다.


어느 날 동네 회합 잔치에 코부리 영감이 동네 유지들을 불러 부어라 마셔라 무진장 술을 퍼 마셨다. 그런데 코부리 영감이 자꾸 종놈을 불러 셋이 같이 마시자고 한다. 정말 죽었다 깨도 겸상하기 싫은 천한 것들인데, 차마 이렇게 말할 수 없었다. 교양 없어 보일까 봐.


그렇게 진탕 술을 마신 그날, 코부리 영감이 종놈더러 나에게 같은 연배이니 반말하며 친하게 지내, 하고 말했다. 종놈이 감히 나에게 반말을 했다.


역시 사람이란 말의 품새에서 행동이 달라진다. 할아버지가 그래서 종놈들에게는 극존칭을 쓰게 하거나 아예 입을 열지 못하게 지져 버리셨었다. 그런데 이것들이 나에게 반말을 한다. 그리고 친구가 되자고 하면서, 내가 놀던 금수저 친구들의 파티장마다 나타나기 시작했다. 돈 앞에서 장사가 없다고 했다. 금수저라는 것들이 빌빌대다 보니 벼락부자가 된 종놈 앞에서 온갖 딸랑이는 아첨을 다 떤다. 참고 싶어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종놈들의 아비의 아비가 농사짓던 땅을 뺏았던 적이 있다. 그 땅을 할아버지가 은행에 담보 잡혀 돈을 빌린 뒤 그 돈으로 할아버지가 큰 재산을 일으켰다. 지금도 은행 대출을 갚지 못해 그 땅이 담보로 제공되어 있는데, 종놈들이 지들 할아버지 땅이라고 우기면서 내놓으라고 내용증명을 보냈다. 정말 미쳐 버릴 상황이다.



할아버지가 네들 나갈 때 집 사라고 엽전 줬잖아!



그건 우리 아비들 노임 일삯이잖아!
우리 할아버지 땅은 돌려줘!




정말 대책 없는 종자들이다. 이리 구슬리고 저리 구슬려도 좀체 들어먹지를 않는다. 이럴 때 할아버지의 지혜가 떠올랐다. 가장 비열한 자를 우두머리를 삼아 전체 종놈들을 휘어잡아라, 라는 교훈이 떠오른 게다.


할아버지가 던져 준 엽전을 받아 엎드려 울던 조그만 머슴의 딸이 김치녀가 되어 종놈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그래서 그 딸을 꼬시기로 했다. 딸은 계약서나 합의나 그런 건 관심 없는 김치녀였다. 오로지 "오빠, 나 예뻐?", 이게 전부인 여자다. "그래, 너 예쁘다~~.", 한 마디에 합의서를 작성하고 종들에게 딸이 설명했다.


이제 할아버지 땅은 잊어버리고 미래를 보고 함께 살아요.





얼빠진 딸의 외침이 공허한 침묵으로 종놈들 사이에 분노의 연기를 피우더니, 갑자기 연기는 큰 불을 일으켰다. 딸은 몇 달 가지 못해 유배를 갔고 종놈들은 다시 그들의 우두머리를 뽑았다. 그리고 다시 다람쥐 챗바퀴처럼 예전으로 되돌아갔다.



집안끼리의 합의는 곧 죽어도 지켜야 하는 것이야!


명분 없는 합의는 깨야 하는 게 이치야!



미칠 노릇이다. 종자가 더러운 것들은 결코 신뢰를 주지 않는다. 한 번 합의한 것을 두고도 계속해서 약속을 어긴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주인이 우리 집안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우쳐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우리 집안에서 건네주는 퇴비를 팔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계약 파기랑은 상관없어. 퇴비를 네들이 마약으로 쓰는 것 같아서 안 파는 거야.



갑자기 내가 왜 이런 구차한 변명까지 했는지 후회된다. 퇴비로 마약을 만들 수는 있나? 아이쿠, 모르겠다. 똑똑한 저놈들은 하고도 남을 거야, 난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리고 퇴비를 달라고 종놈들이 웃돈을 들고 와도 절대 내주지 않았다.


그런데 종놈들이 서너 달 지나면 두 손 두 발 들고 올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아예 연락도 없다. 우리 집 마당엔 퇴비 썩는 냄새에 외출도 하기 힘들 지경이다. 저 퇴비들을 하는 수 없이 내주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데 정말 어쩌지? 큰일이다. 큰일이다. 큰일이다.


어느 찌린 내 그득했던 여름 날. 금수저 클럽에서 어려서부터 같이 놀던 기르만이 술 한잔 하자고 찾아왔다. 그리고 기르만과 예전 좋던 시절의 이야기를, 물론 둘 다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다, 주고받다가 기르만이 황당하게 웃으며 말했다. 약간 비웃는 듯한 말투였다.



저 동네 아그들이 떠들고 다닌다는디? 아는 감?
"너가 건드려선 안 될 것을 건드려 버렸다고"



얼굴은 발갛게 피었는데 술의 알코올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처음 귀로 듣는 말이지만, 낯설지가 않다. 왜냐하면 평소에 계속 그런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매일 밤, 매일 낮, 퇴비를 볼 때마다, 퇴비 냄새가 날 때마다, 항상 그런 불안감이 들었다. 그리고 절대 머릿속을 불안감이 떠나지 않았다.



내가 건드려선 안 될 것을 건드려 버렸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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