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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Nov 08. 2019

네 애미ㆍ애비는 하나님에게 감사할 줄도 모르나

[나는 나를 사랑할 의무가 있다]

왜 헌금 안 내?
하나님이 네들 부모들 다 먹고살게 보살펴 주시는데, 아무리 무식해도 그렇게 몰라?



기독교 교리를 중시하는 사립 재단이 운영하던 중학교를 다녔다. 사립 중학교라고 해서 명문가  자제들이 다니는 곳이 아니라, 소위 뺑뺑이로 누구나 가던 동네 중학교였다. 말이 학교이지 거의 고물상 부지 같은 곳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재단 이사장은 구속시켜도 될 정도로 낙후한 시설과 건물로 많은 인명사고가 발생했고 인간 존엄성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쓰레기 집하장이었다.


교과목  중에는 '성경' 시간이 있었고 목사라고 소개했던 교목 선생이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히포 브랜드 달린 잠바와 나이키 운동화를 틈만 나면 자랑하던 밑바닥 인생이었다. 일주일 한번 돌아오던 성경 시간마다 헌금을 강요했다. 백 원씩 동전을 내밀면서 한주 한주를 넘어가기 일쑤였다. 많이 내는 절실한 신자 집안의 아이들은 오백 원도 냈다.


한 달에 한 번도 헌금을 내지 않으면 이름을 불러 교단 앞으로 부른 뒤, 남자아이들 성기를 검지로 튕겨 혼을 냈다. 서로가 무지해서, 때리는 교목이나 맞던 학생이나 바보같이 히히덕거리며 고통을 희화했다. 그러다 평소 맘에 들지 않던 아이가 불려 나오면 온갖 음란 패설과 욕설이 끊이질 않았다.


보통의 선생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는 그래도 함부로 하지 않았는데, 교목은 학생들 성적이나 학습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나도 퍽퍽 또는 짝짝 소리 나게 귓뺨을 맞곤 했다. 중학교 1학년과 2학년을 대상으로 성경 수업을 했기 때문에, 감히 뚱뚱한 히포 잠바 입은 교목에게 대들지 못했다.


그때 교목의 별명이 '돈뚱'이었다. 돈만 밝히는 뚱땡이, 를 줄여서 '돈뚱'이라고 뒤에서 멸시했다. 어느 날 담임이 검적색으로 부풀어 오른 내 뺨을 보고는 난리를 피웠다.


어느 새끼가 ○○○ 때린 거야!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우리 반에 그때 72명이 있었지만, 나는 키가 커서 69번이었다, 감히 교목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감히 전교 1등을 어느 미친놈이 때렸냐, 라는 행간의 분노를 에둘러 고래고래 소리쳤다. 역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직접 열었다.


제가 헌금 안 낸다고 교목 샘이 때렸는데요.




잘못 들었는지, 혹은 괜히 물어봤다 싶었는지, 담임이 나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리고 뒤돌아 교무실로 향했다. 두 시간 후 나는 교목에게 복도에서 걸레 밀대 피멍이 낭자하게 구타당했다. 수십 명이 지나다니던 복도에서 전교 1등이 교목에게 죽도록 얻어터졌다. 엎드려뻗쳐, 자세로 말이다.



야이! 야아! 그만 때려!



삼십 대쯤 맞자 더 이상 맞았다가는 정말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들었다. 살겠다는 생각과 평소 돈뚱에 대한 경멸이 마침내 폭발했다.


밀대를 뺏어 돈뚱을 그것으로 사정없이 휘둘팻다. 몽둥이를 피하려 등을 드러낸 돈뚱은 머리와 등을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다. 더 이상 돈뚱이 움직이지 않자 나는 몽둥이질을 멈추고 교실로 걸어갔다. 가방과 책상 속 교과서를 챙긴 뒤 그대로 운동장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학교 앞에서 노점 하던 부모님을 담임과 학생주임이 찾아왔다.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부모에게 선생 둘은 다행이다, 싶었는지 거짓말을 했다.


○○○이 오늘 다른 샘한테 많이 맞았는데요, 뭐라 하지 마이소. 지도 속 마이 상했을깁니더.



밤새도록 무식한 부모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이실직고하라고 들볶았고, 나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 환자여서 아무 말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밤새도록 온갖 욕설을 부모에게 들었다. 밤낮으로 짐승 같은 어른에게 시달렸다.


다음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는 등교했다. 갑자기 교실문이 쾅하고 열리더니 얼굴에 붕대를 두른 돈뚱이 나타났다.


오늘도 손대면 이제는 다 끝장나는거다.



속으로 결전을 다짐했다. 하지만 돈뚱은 '네가 전교 1등이었어? 얘기를 하지.', 아양인지 화해인지 혹은 겁을 먹었는지 역겨운 말과 행동을 보였다. '느닷없이 내가 너한테 가서 나 전교 1등이요.', 이렇게 말하냐?, 라고 속으로 소리 죽여 욕했다. 그리고 한 마디는 소리내어 말했다.


'하느님'이 헌금 낼 돈 없는 집 아이들은 때리도 된답니까?




난 그날 알았다. 개신교에서 God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돈뚱은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모셔야 한다고 설교를 늘어놓았다. 그래서 나는 그날부터 '하나님'이란 자를 경멸하기로 했다. 그리고 돈뚱은 내가 졸업할 때까지 내가 헌금을 내지 않아도 내 이름만은 절대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성경 시간이면 매번 나는 책상에 엎드려 오지도 않는 잠을 청했다. 그것도 고역이었다.



카톨릭 신자가 된 뒤, 모태신앙자인 처남과 성당 얘기를 하다가 하나님의 호칭에 대해 격론이 벌어졌다. 나는 하느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맞다, 라고 돈뚱이 내게 새긴 마지막 성경을 토해냈다. 처남은 하느님과 하나님 모두 맞다고 주장했다.


매형, 제가 모태신앙이에요. 전 늘 하느님이라고 했어요.




며칠 전 jtbc 뉴스에서 앵커가 이렇게 해묵은 논란을 정리해줬다.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쓰고, 천주교에서는 다 쓰는데 하느님을 더 많이 쓴다는군요.



나는 세례를 받고 견진을 한 하느님의 신자다. 얼렁뚱땅할 때도 있지만 내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고 늘 잊지 않는다. 그래서 난 이 날부터 나의 야훼를 '하느님'으로만 부르기로 했다.


유일신 GOD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토속신 중 가장 높은 신인 하느님으로 대환되었고, 조선 말 평양을 중심으로 신지식인들이 득세하면서 평안도 사투리인 '하날님'에서 하나님으로 변했다. 일부 몰지각한 신도들이 유일신이라서 하나님이라는 억지를 쓰지만 무식의 소치다.


나는 오십 평생 살면서 두 명의 신을 모셨다.
하나님과 하느님, 두 신을 받들었다.
한 신은 경멸로 종결되었고 한 신은 아직 진행형이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자존을 지키려고 하나님을 버렸다. 그리고 삼십 년이 흘러, 나는 다시 나를 사랑하고 나의 헐벗은 자존감을 따뜻이 보호해 주려고 이제는 하느님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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