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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Dec 17. 2019

1년에 100억씩 30년 동안 돈 쓸 생각에 미친 남자

인생을 이렇게 사는 것도 한때다

애플의 인피니티 루프가 오픈되고 그곳의 애플스토어에서 아이패드 펜슬을 살 때였을 때로 기억한다. 실리콘밸리의 회사에 도착하면 이웃 도시에 외근 온 것처럼 아침부터 업무를 시작하곤 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는 국적기가 현지 시각으로 10시경이면 도착하는데, APEC카드로 입국심사와 물품 신고를 일사천리로 끝내면 국내선에서 내리듯 재빠르게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다.


바다와 태양,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AT&T 파크를 눈에 담아 서부의 하루를 시작한다. 팔로알토, 쿠퍼티노, 레드우드 등에서 이리저리 업체와 사람들을 만나다 저녁이면 산호세 엘카미뇨의 한식당에서 고기와 소주로 시차 적응을 위한 복약을 마친다. 다음날부터 붓지 않은 눈과 목으로 쾌활한 이틑날을 맞이했다.


이름을 밝혀서는 안 될 것 같아서 간단히 A사의 T라고 표기하자. 세계 굴지의 A사와 IT 관련 제품을 기획하던 나는 A사의 어느 임원과 점심 겸 간략한 미팅을 하게 됐다. 그는 집에서 애인이 챙겨준 야채, 채소와 과일 등이 촘촘히 퍼즐같이 맞춰진 도시락을 먹었고, 나는 간단한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웠다. 사업 이야기가 흥미로웠고 A사 임원이 되기 전에 독일에서 벤처기업을 경영했다던 그는 나의 경영 스토리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더 많은 대화를 위해 그의 집무실로 안내받았다.


시큐리티의 출입등록에 살짝 언짢아하던 나에게 그는 몇 차례나 사과를 했다. 원칙적으로 사전 예약이 되지 않으면 당일 출입 등록을 하는 데는 무리가 뒤따른다고 했다. 그래도 동서고금의 어디서나 보스의 신경질을 이겨낼 직원이 드문지라, T가 두 손을 위아래로 휘저으며 불쾌한 심정을 내비치자, 시큐리티 매니저가 자신의 재량으로 태그 없이 사무동 출입구를 열어주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T와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상큼한 미소를 날려줬다.


미국애들 가식적인 건, 따라갈 수가 없어.


아직은 독일인이었던 T는 실리콘밸리의 미국인들, 미국인이 되려는 똑똑한 유학생과 이민자들, 그들에게 치여 사는 레드넥의 불쌍한 백인들, 그들의 수입을 원천으로 상권을 형성한 일본인과 히스패닉계에 대해서 거침없는 성토를 내게 쏟아냈다. 같은 외국인이라는 게 오히려 동질감을 만들어준 이상한 경험이었다.


T의 말에 따르면, 20대 후반에 독일에서 창업한 IT부품 회사를 잘 키웠는데 유럽의 환경 상 동유럽과 북유럽 국가에서 제조해 IT 부품을 공급하는데 한계가 있어 중국 업체들을 알아봤다고 했다. 그런데 이 중국 업체들 가운데 A사의 협력업체가 있었고, 이 협력업체를 감독하던 A사 임원이 본사에 T의 회사를 소개했다는 것이다. 그 후 T와 각종 협력방안을 모색하던 A사에서는 T가 사실상 100%의 지분을 가졌던 그 회사를 인수했다고 말했다. 3억 달러 정도였는데 5년간 A사 글로벌 소싱 파트에서 일해야 한다는 조건부 조항을 수락해야 했다. 나를 만난 T는 당시 4년 하고도 3개월이 지난 상태였다. 9개월 후면 사직서를 쓰고 자유의 몸이 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독일과 폴란드의 직원들은 모두 해고되었고 미국의 A사가 유럽 IT 완성품 시장을 독식했다.



그의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는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그의 엑셀 파일에서 엿볼 수 있다.


이게 내가 만든 나의 Life Schedule이야, 지난 4년간 계속 업데이트해 왔어.




 그가 나에게 보여준 그의 Life Schedule은 엑셀 파일이었다. 엑셀 파일을 연 순간 그의 인생이 펼쳐졌다. 그의 엑셀 속 인생이 앞으로 9개월 후 어느 날부터 시작하는데, 그가 70살이 마감되그 다음 생일날 끝난다. 그는 70살까지 살다가 스스로 생을 끊을 거라고 말하면서, 그가 그의 30여 년을 얼마나 상세하게 계획해 놓았는지 자랑했다.


엑셀 파일은 총 3개의 시트로 나뉘었는데 시트별로 10년씩의 미래를 하루 단위로 쪼개 놓았다. 원래 A사에 임원으로 들어온 뒤, 무료한 직장 생활을 견디지 못해 장난 삼아 연간 단위로 자신이 바라는 삶을 도식화했다고 한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아 엑셀 파일로 월간으로 구분해 보다가, 아예 일 단위로 그의 미래 30년을 꼼꼼히 기획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A사에게 받게 될 3,000억원 가운데 1,000억원은 독일의 모교와 도시에 기부하고, 남은 2,000억원으로 30년 동안 미친 듯이 돈을 쓰며 살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했다. 그래서 연간 단위로 쪼개면 1년에 대략 67억원을 써야 하고 연간 33억원 정도를 기부해야 하는데, 단순히 이렇게 쪼개어 보니 별 재미가 없더란다. 그래서 월간으로 나누어 봤다가 최종적으로 일 단위로 돈 쓸 계획서를 엑셀로 만든 것이었다.


보트, 요트, 별장, 페라리에서 시작한 갖고 싶은 물건들, 스페인과 체코의 음란한 클럽, 이비자 프리미어 클럽, 모스크바의 핑크 케이브 등등 들러서 놀고 싶은 곳들, 모교와 노인들을 위한 실내체육관 건립, 고아원 신축, 대학 기부금, 독일 이민자 2세들을 위한 장학재단 설립에 이르기까지의 세부적인 이행 일정들,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리랑카, 몽고, 페루, 남극 등 달마다 들러야 여행 장소들에 이르기까지 촘촘하게 엑셀 시트에 담았다.


그리고 각 일 단위 일정의 아랫칸에는 하루마다 써야 할 돈을 엑셀 수식으로 계산해 연계되도록 연동시켰다. 그래서 3,000억원이 모두 사용될 수 있도록, 남는 돈이 없도록, 완벽히 계산했다. 하물며 이자 비용까지 계산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난 이 돈들을 아무 생각 없이 이 엑셀표대로 써 나갈 거야.
그리고 71살 생일 전날 난 자살할 거야.



나는 그날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개발자들이 생각해 본 적도 없었을, 엑셀 세계의 귀재를 만났다.  


그는 최근 두어 달 전에 나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일본에서 두 달을 보내는 중이라고 했다. 아직도 엑셀표대로 돈을 쓰는 중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당연한 질문을 왜 하느냐, 라면 웃었다. 그리고 그는 70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지난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교통사고라고 전해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데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는 어려서부터 알았다.

그리고 3천억원을 가지고도 아무 생각없이 살기엔 인생이 너무 복잡하다는 것도 죽기 전에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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