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강제병합을 즈음하여 국내로 일본을 거쳐 온 서양문물이 물밀듯 밀려왔다. 물론 일본식 문물도 함께. 식문화는 조선시대 기생문화와 달리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레저문화가 되었다. 그래서 술과 가무를 즐기는 유흥문화와 함께 고급 요리와 분위기로 상황을 즐기는 레저문화가 공존하게 됐다. 유흥문화는 유곽, 기방 등으로 발전했고 식레저문화는 서양식 레스토랑으로 고착화됐다. 물론 서양식 레스토랑의 음식은 일본식 경양식과 정통 유럽식으로 공존했다. 하지만 유흥문화와 식레저문화의 상차림은 확연히 구별됐다.
유흥문화는 공통형과 공간전개형이고, 식레저문화는 시계열형이다.
그럼 여기서 상차림 방식에 대해 알아보자.
아래 1은 일인당 한상으로 차려지는 개별형이다. 갑오경장 이전까지도 조선사람들은 지금과 달리 남녀 모두가 이렇게 개별상을 받았고 일본은 지금까지도 개별형을 고수한다.
흔히 가부장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개별상을 받고 나머지 식구들은 한상에 먹는 모습은 우리의 전통 예법이 아니다
갑오경장으로 노비해방 뒤 가정을 꾸리기 어려울 정도로 하인들을 고용할 여유가 사라지자 양반가에서 일부만 기존처럼 개별상을 주면서 생긴 경제적 절충안이었다. 백 년 밖에 안된 잠시의 역사로 수백ㆍ수천 년을 호도해선 안된다.
전주 한정식처럼 차려진 상이 공통형이다. 개인 식사용 밥과 국만 개별적이고 나머지는 모두 큰상 위에 두어 다 같이 먹는 방식이다. 전주 한정식을 보며 우리 정통 남도식이라 여기면 큰 오산이다. 갑오경장 후 조선에 침투한 일본식 유곽의 상차림을 한식으로 꾸린 것이다. 우리 정통식법이 아니다.
그림 3의 공간전개형은 공통형처럼 음식을 다 같이 먹도록 한 번에 올려놓는다. 공통형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차이점은 공통형과 달리 개인용 식사 음식이 없다. 즉 오늘날의 뷔페라 생각하면 된다.
고급 서양식 레스토랑에 가면 메뉴판에 맞는 순서로 음식이 순차적으로 연이어 내어 진다. 이 같은 방식을 두고 시계열형이라 부른다. 시계열형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음 음식이 나오는데 연이은 음식이 무엇인지와 언제 끊어지는지를 알기 위해 만들어진 게 메뉴판이다.
그런데 이런 시계열은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고급문화가 아니다. 후진국 러시아식 식문화를 서유럽에서 따라한 것이다.
러시아식 시계열형은 19세기 초기에 서유럽에 전파됐는데 이전까지 프랑스 베르사유 등에서는 공간전개형이나 공통형으로만 식사 시간을 즐겼다. 러시아식은 시원찮은 식재료와 식문화로 인해 서유럽처럼 크고 화려하게 공간전개형으로 펼치기 힘들었던 러시아 입장에서의 고육책이었다. 다닥다닥 앉아서 몇 가지 음식을 시간 순으로 먹으면서 눈을 속이고 배를 불려 적은 식사 음식의 종류와 수수함을 속였다. 그런데 이런 러시아식 식문화가 시종을 부리며 음식마다 자랑질을 하며 으스대기 좋은 시간을 벌어준다는 생각에 서유럽의 궁정에서부터 19세기 초반 대유행으로 전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