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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별 Oct 03. 2023

두 자매 북클럽

실천9. 고전 읽기

두 아이를 키우면서 거실에 TV를 없애고 책장을 두었더아이러니하게도 나만의 미디어 이용 시간이 더욱 소중해졌다.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주로 책을 읽지만, 아이들 눈을 피해 SNS나 OTT를 이용하느라 '몰폰' 기술이 날로 늘고 있다. 샤워하기 전 잠깐 인스타그램을 들여다보거나 아이들이 잠든 후 졸린 눈을 비벼가며 넷플릭스를 보는 식인데, 때로는 당당하게 유튜브를 보기 위해 거금을 들여 모신 식세기 이모님을 두고도 접 설거지를 하기도 한다. 엄마가 어떤 영상을 보는지 아이들이 궁금해할 때도 있어서 적당한 길이의 건전하고 재미있는 영상을 찾다 보니 주로 민음사 TV의 '세계문학전집 월드컵'을 보게 되었다. (눈을 빛내며 내 주위를 기웃거리던 아이들은 '아휴, 또 책 이야기네.' 하며 각자 하던 일로 돌아간다.)


영상은 민음사 세계문학 담당 편집자 두 분이 '파국소설', '최악의 애인', '명문장' 등 주제 아래 관련 해외고전 작품들 토너먼트를 진행하시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두 편집자가 각자 자신이 추천한 작품이 왜 다음 라운드에 진출해야 하는지 어필하는 과정에서 들려주시는 이야기들이 정말 매력적이라  어렵게만 보였던 고전소설들이 다음 화가 궁금한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느낌과 실행은 다른 문제라서 막상 고전 읽기를 시작하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등잔 밑에서 소중한 짝꿍을 만났다.


[노인과 바다], [프랑켄슈타인], [변신]. 지난 두 달간 아주 느린 페이스로 여동생과 함께 읽은 고전 소설들이다. 얼마 전 [오만과 편견]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는 동생의 근황을 듣고 '다음에 읽게 될 책은 나도 같이 읽자'며 가볍게 제안한 것이 시작이었다. 서로 다른 지방에 사는 데다 무소식이 희소식인 연락 패턴을 갖고 있었지만, 같은 환경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동질감을 무기 삼아 본격적으로 우리끼리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우리 자매는 모두 이름을 한 번씩 바꾸었는데 예 이름에서 한 글자씩 한자 뜻을 가져와 '하늘숲 북클럽'을 결성하고 둘만 참여한 오픈채팅방에서 느슨 독서 연대를 유지하고 있다.


[노인과 바다]에서 상어들에게 살점 다 뜯겨버리고 뼈만 남은 청새치를 안타까워하고, [프랑켄슈타인]을 보며 '그 머리에 못 박힌 괴물이 프랑켄슈타인이 아니었어?' 놀라고, 벌레로 변한 뒤에도 기차시간을 걱정하는 [변신] 속 그레고리를 보며 'K-직장인은 좀비에 물려도 출근할 것'이라는 대화를 나누는 우리 모습은 일일드라마를 함께 보며 조잘조잘 수다를 떠는 어린 시절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끼리는 간혹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고, 시대적 배경이나 작가의 생애에 얽힌  전문적이고 심오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하지만 우리 마음과 피부에 와닿은 장면과 문장들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혼자 읽는 것보다는 훨씬 풍성한 독서를 할 수 있었다.(혼자서는 아직도 '고전 소설 읽고 싶다'는 느낌만 간직하고 있었겠지 싶다...)


드라마가 끝나면 각자 방으로 들어가던 그때와  달라진 점이라면 다양한 매체를 이용한 경험의 확장이다. 1950년대에 개봉한 '노인과 바다' 영화를 통해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장면이 영상에서는 어떻게 그려졌는지 비교해 보고, 프랑켄슈타인이 치러야만 했던 혹독한 대가와 괴물의 고독에 마음 아파하며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속 '난 괴물'이라는 곡과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괴물과 프랑켄슈타인을 번갈아가며 연기한 영국 내셔널 시어터 연극도 찾아보았다. [변신]을 읽고서는  한 때 유행했던 "내가 바퀴벌레로 변하면 어떻게 할 거야?"라는 질문에 각자 답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을지에 대해 서로 깊은 마음을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그레고르가 변한 바퀴벌레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동생 왈, "이걸로 토론을 하게 되네.")


추석에 친정에서 만나서도 '우리 다음엔 어떤 책 읽을까?'를 가장 먼저 이야기했다. 이번엔 남자 주인공이 집착광기 끝판왕이라는 [폭풍의 언덕]을 읽기로 했는데, 이 책을 통해서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 아직 첫 장을 펼치기 전인데도 기대가 한가득이다. 까지는 다소 길이가 짧은 책들을 읽었는데 언젠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나 [안나 카레니나] 같은 벽돌책에도 도전해보고 싶다. '하늘'만큼 넓고 '숲'처럼 깊은 고전의 세계를 함께 걸어갈 친구가 있어서 예전만큼 두렵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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