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아빠랑 같이 TV를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나는 주로 만화와 드라마를 보는데 아빠는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보시니까, 내가 TV 앞에서 멍하게 앉아있지 않는 한 우리 부녀가 나란히 거실 소파에 앉아 같은 화면을 공유할 확률이 매우 낮았다. 단 한 가지 프로그램만 빼고.
한국 중년 아저씨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헤어스타일의 뽀글 머리 아저씨가, 미술시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굉장히 크고 넓적한 붓으로 물감을 쓱쓱 칠하면 마법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주는 <밥 로스의 그림을 그립시다>만큼은 온 가족이 홀린 듯이 빠져들어 보곤 했다. 담양 시골마을에 살던 어린 나는 수채화든 유화든 전시회나 미술 작품을 거의 접하지 못했었지만 그림이란 정말 멋진 것이라고 처음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떤 영역에서 일정 수준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하는 일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굉장히 쉬워 보인다. 밥 로스 아저씨의 사람 좋은'어때요, 참 쉽죠?'라는 말 뒤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깔려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즐거운 마음으로 수채물감과 물통을 들고 등교했던 날, 당혹스러움과 실망을 맛보았던 미술 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뒤로 미술은 내가 감히 시도해 볼 어떤 것이 아니라 감상의 대상으로 오랜 시간 존재해 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동네 문구점에서 물감과 붓을 다시 사게 된 계기는 그림책이었다. 첫째가 태어났을 때부터 10년 가까이 매일 자기 전에 아이들과 그림책을 읽는다. 그림책은 아이들만 보는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시간이 나를 위한 치유와 회복의 시간이 되었다. 글과 그림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큰 울림을 주는 그림책의 매력에 푹 빠졌고,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만 따로 모아두는 책꽂이가 생길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지인의 권유로 그림책 모임에 참여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 장면들을 직접 그리는 일에 도전하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들은 대부분 수채화였다. 물감이 물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다른 색과 섞이면서 빚어내는 고운 색들이 내 마음에도 번졌다고 멋을 부려 해석해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물감에 물은 얼마나 섞어야 하는지, 무슨 색을 어떻게 섞어야 내가 원하는 색이 나오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기만 했다. 지우개똥을 가득 쌓아가며 밑그림만 그리다가 원장님으로부터 '그렇게 하면 종이가 상해서 채색이 밉게 되니까 밑그림부터 너무 욕심내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고, 뭐든 시작하면 잘하고 싶은 욕심이 큰 편이라 책에 나온 빛깔과 비슷한 색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적잖이 속이 상했다.
전시회에 출품하는 작품도 아닌데 비뚤어진 선 하나, 생각과 다르게 번진 붓질 한 번에 안달복달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던 원장님이 조용히 다가와 "그림은 복사가 아니에요."라고 일러주셨다. 그 뒤로는 '이건 나만의 그림이니까 달라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좀 더 편하게 임(하려고 노력)했고, 그래도 더 잘하고 싶을 땐 원장님 손을 빌려서 욕심을 채우기도 했다.
한 점 한 점 그림이 쌓여갈 때마다, "와, 이 그림 너무 예뻐.", "글이랑 정말 잘 어울려."에서 "이건 어떤 재료로 그렸을까?", "이 색은 어떤 색들을 섞어야 나올까?"로 그림책을 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떨리는 손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색을 입히는 시간 속에 찾아오는 몰입의 순간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림과 글을 읽는 소리로 받아들이던 그림책을 내 두손이 만든 빛깔로 더욱 깊이 느낄 수 있다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꿈에서 깬 듯 복직과 함께 그림책 모임에 더 이상 나갈 수 없게 되었고, 주말에 혼자서 몇 번 그리기를 시도하다가 마음속에서 뭔가 시들해져 버렸다. 아주 오랜만에, 이 글을 쓰며 잠시 멈춰버린 행복한 시간을 꺼내보았다. 수납장 한편에 모셔둔 미술용품을 괜히 뒤적여본다. 붓모는 아직도 탄탄하고 팔레트에 정성스럽게 짜둔 물감들도 아직 곱다. 어떤 장면을 그릴까 고민하며 머릿속에서 그림책 책장이 넘어간다. 멈췄던 시간도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깎은 손톱>, <용의 눈물>, <이만큼 컸어요>, <첼로, 노래하는 나무>의 한 장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