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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별 Jul 06. 2023

술과 양과 사자와

실천2 - 아빠를 이해해 보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는 시 구절처럼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종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다. 나는 100도씨가 되면 끓는 물이나 불이 붙으면 청록색 불꽃을 보이는 구리 같은 원소가 아닌 유기체니까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상황에서는 내 의견을 물어도 대답도 못하는 조용하고 소극적인 사람이다가도 또 어떤 상황에서는 혼자서 에스토니아나 아이슬란드 같은 먼 곳으로 훌쩍 떠나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기도 하는 적극적인 사람이 되는 나를 보며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할 때가 많다.


요즘 유행하는 MBTI 성격 유형에서도 "타인을 향한 연민이나 동정심이 있으면서도 가족이나 친구를 보호해야 할 때는 가차 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반면 관계술에 뛰어나 인간관계를 잘 만든다."처럼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서술이 함께 적혀있다.


사람들과 활발히 교류하는 외향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 조용히 누워만 있는 것을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한 사람을 하나의 성향으로 묶어두기에는 우리에게 다양한 모습이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한 내 모습 중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숨어있는 또 다른 나를 일깨워주는 존재 중 하나가 술이라고 생각한다.

<탈무드>에서 술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고 있을 때 악마가 다가왔다. 무엇을 심느냐는 악마의 질문에 노아는 '포도라는 달고 새콤한 과일인데 발효시키면 기분을 좋게 하는 술이 된다'라고 답해준다. 악마는 '그렇게 좋은 거라면 나도 거들고 싶다'며 양, 사자, 돼지, 원숭이의 피를 거름으로 주었고 그 결과 술을 마시면 양처럼 순했다가도, 좀 더 마시면 사자처럼 사나워지고 돼지처럼 추악해지고 원숭이처럼 소란을 피우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사람에 따라서, 술을 마시는 양에 따라서 그 사람은 양도되고 사자나 돼지나 원숭이도 되어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드라마를 보면 딸이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왔을 때, 아버지가 계속 술을 권해서 남자친구가 취하게 만드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술이 사람을 못된 놈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원래 못된 놈이라는 것을 술이 밝혀준다'는 말도 있는 것처럼, 사회적 가면을 벗은 그 사람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딸아이가 만나도 괜찮은 사람인지 알아보는 일종의 테스트인 것이다.


평소에는 말없고 점잖던 아빠가 술에 취하면 심하게 과격해지고 감정적이 되는 모습을 어릴 때부터 봐왔고, 그로 인해 온 가족이 고생했기 때문에 술은 늘 두려운 존재였다. 어린 마음에 너무나 다른 아빠의 두 모습이 혼란스러워서 평소의 아빠가 '진짜' 아빠인지, 술 취했을 때 아빠를 감추기 위한 '가짜'아빠인지 생각해 보는 철학적 고민을 안겨준 존재이기도 했다. 나에게는 과학자 브루스 배너를 헐크로, 지킬박사를 하이드로 만드는 매개체가 분노도 인간 본성에 대한 연구도 아닌 술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저건 무조건 멀리 하자, 저걸 마시는 사람도 멀리하자'는 다짐을 했던 것 같다.


술을 직접 마실 일이 없는 청소년기에는 그저 두렵게 바라보고 피하던 대상이었는데, 성인이 되어서 직접 술을 마실 일이 생기자 정말 이걸 마셔도 괜찮을까 하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술 마시는 아빠를 피해 고향을 떠나 다른 지방 대학에 입학했는데 정작 신입생 환영회나 동아리를 비롯한 대학교 신입생 문화는 거의 모든 것이 술과 연결되어 있었고, 지긋지긋한 수능 공부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과 민증이 주는 자유로움이 이끄는 곳도 결국은 술 마시는 곳이었다.


결과적으로 내 고민과는 상관없이 강압적인 MT문화 때문에(?) 덕분에(?) 술을 많이 마실 일이 생겼지만 취하면 사람이 변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서인지, 술을 잘 마시는 몸을 타고난 것인지 취한 나는 평소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다행스럽게도 '조용한 애가 취하면 딴판'이라는 말을 듣거나 술 마신 다음 날 친구들이 내 곁을 슬금슬금 피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알코올의 힘을 빌려 평소 부족했던 적극성을 얻게 되어 어색했던 친구와 가까워지거나, 친한 친구의 남모르는 고민을 나누기도 했다.


​이렇게 내가 스스로에게 걸어두었던 '금주'라는 결계가 풀리자 술은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더운 여름날 육퇴 후 시원한 맥주 한 잔, 축하할 일이 있을 때 친구와 와인 한 잔, 남편과 넷플릭스를 보며 공모양 얼음을 띄운 하이볼 한 잔, 비 오는 날 파전과 함께 먹는 막걸리 한 잔은 평온한 일상을 깨지 않고도 하루를 좀 더 충만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사나운 인상 때문에 멀리 피하기만 했던 대학 선배가 알고 보니 여자친구에게 정말 다정하고 후배를 잘 챙겨주는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악역전문 배우 박성웅 씨가 허당미를 발산하며 바밤바를 외치는 광고를 만났을 때의 반전매력처럼 나도 모르게 완전히 '술며들었다'고 해야 할까.


​내 안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몰라 겁먹었던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내가 정말 두려워했던 대상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연습을, 술을 통해 할 수 있었다. 여전히 아빠가 많이 밉지만 소심한 성격에 하지 못했던 말들을 술기운을 빌어 뱉어야 했을 그 마음들이 아주 조금은 안쓰럽기도 하다. 내 안에 앙금처럼 남아있는 아빠에 대한 어둡고 무거운 조각들로 맑은술을 빚어 아빠에게 건네고 싶다. 아빠의 다양한 모습들 중 술에 취한 사자는 어린 나를 정말 힘들게 했지만, 다른 때의 아빠는 양처럼 부드럽게 나를 안아주기도 원숭이처럼 나를 웃겨주기도 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고. 그 모든 모습이 아빠였으니 받아들여 보겠다고.



그림출처: https://www.etsy.com/listing/525710128/will-bullas-signed-art-print-peaceable?ref=share_v4_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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