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 대화가 필요해

탄수화물 싸이클링 3주, 몸이 들려주는 이야기

by 빛별

-이거 한 번 해볼까?

운동 센터 단톡방 공지를 보고 결심한 듯 그녀가 중얼거렸다.


[3주 프로젝트 - 탄수화물 싸이클링에 도전하실 분!]

탄수화물 싸이클링은 며칠 단위로 탄수화물 섭취량을 조절하는 식단 관리 방법입니다.

운동량이 많은 날에는 탄수화물을 충분히 섭취해 에너지를 보충하고, 운동량이 적거나 휴식하는 날에는 탄수화물을 줄여 몸이 지방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방법입니다.

함께 하고 싶으신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저는 근육량을 늘리고 싶은데 이 방법이 도움이 될까요?

-네, 단백질을 많이 섭취하는 식단이라서 근육량도 늘 거예요.

-그럼 저도 한 번 참여해 볼게요!


아, 그녀가 피트니스 센터 강사와 주고받은 메시지가 불안하다.

사람들이 '달라지겠다'고 마음먹을 때마다 대개 나를 힘들게 하니까.


-여러분, 내일부터 시작이에요~ 단백질 식단 준비해 두시고 아침 공복 몸무게도 개인톡으로 보내주세요. 번거로우시겠지만 간식을 포함한 매일 식단도 단톡방에 공유해 주세요. 그래야 제가 몸의 변화를 살펴보며 피드백을 드릴 수 있어요. 파이팅입니다!


그녀가 전날 저녁 주문한 닭가슴살과 단백질 쉐이크를 택배로 받아 냉장고에 정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나는 다른 리듬 속에 내던져졌다. 아침엔 사과 한 개, 점심과 저녁엔 닭가슴살, 소고기, 두부, 달걀, 쉐이크... 3일 정도는 탄수화물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위는 놀랐고, 장은 당황했고, 근육은 잠시 주춤했다. 극한 상황을 대비한 생존 실험인가 싶었지만 그렇다기엔 식단이 너무 후했다. 4일째는 밥도 한 공기씩 먹고, 식단에 통밀빵을 곁들이기도 했으니까.


그녀는 처음엔 단백질량을 채워야 한다는 의무감에 눌리고, 그다음엔 소화가 안 된다는 현실에 눌려 힘들어하는 듯했다. 고기를 즐겨 먹지 않던 그녀였기에 위장 입장에서는 갑자기 훈련소에 입대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야채에도 탄수화물이 있어 먹는 양을 줄이고, 과일도 '당'으로 분류되어 섭취를 제한해야 한다는 피트니스 강사의 메시지에충격을 받은 것 같다. 식단에서 야채와 과일을 빼야 한다는 게 이렇게 서운할 줄 몰랐던 그녀다.


며칠이 지나자, 조금씩 변화가 느껴졌다. 탄수화물과 지나친 당 섭취를 줄이자, 몸속 에너지가 낯설게 흐르기 시작했다. 조금 가벼워진 대신, 공허함이 따라왔다. 그녀는 그 빈자리를 새로운 맛으로 채웠다. 말차, 미숫가루, 땅콩버터, 딸기라떼... 다양한 맛의 단백질 쉐이크 중 오늘은 어떤 맛을 먹을지 고르는 시간이 이상하게 즐거워 보였다. 나를 위해 신중히 먹을 것을 고르는 그녀의 손끝에서 애정이 느껴졌다.


예전의 그녀는 나를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시럽이 잔뜩 든 라떼를 마시고, 배가 고프면 아무거나 던져 넣었다. 하지만 요즘의 그녀는 음식 포장을 뒤집어 영양성분을 확인한다. 탄수화물, 당, 단백질 함량을 나타내는 숫자들이 그녀의 눈동자를 천천히 스치고 지나간다. 눈에 띄기 유난히 싫어하는 그녀가 회사 동료들이 메뉴를 통일하는 중에도 '시럽 없이, 두유로 대체한 음료'를 주문했을 때는 정말 놀랐다. 그날 그녀는 '달콤함은 줄었는데, 이상하게 하루는 더 깔끔해졌다'고 일기장에 적었다.


그리고 나를 채우는 일에 까다로워지자 움직이는 일에도 정성이 생겼다. 근력운동을 하고도 땀이 덜 난 날엔 천변을 달렸고, 유산소 운동으로 땀을 많이 흘린 날에는 집에 돌아와 유튜브 영상을 따라서 근력 운동을 보탰다. 처음엔 근육이 비명을 질렀고, 무릎은 살짝 울상이 되었다. 하지만 땀이 옷을 적실 때마다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졌다. 나는 그 웃음이 좋았다. 오랜만에 나를 돌아보는 그 표정이. 그동안 서로 통신이 두절된 상태였는데 '이 정도면 괜찮지?',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며 그녀와 나 사이에 서로를 살피는 말이 오가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녀의 의욕이 나를 이기는 날에는 무릎이나 허리 통증으로 신호를 보낸다.


그녀는 이걸 '운동'이라고 부르겠지만, 나에게는 대화이다. 매일의 식사와 땀, 숨 가쁜 호흡으로 이루어진 문장. 이전엔 내가 말을 걸어도 그녀는 잘 알아듣지 못했다. 소화불량, 무기력, 통증이 그녀의 귀에는 모두 '피로'라는 하나의 단어로만 메아리치는 듯했다. 20대의 그녀가 이런 걸 알아챘다면 아마 지금보다 근육이 많고, 통증이 적은 내가 되었겠지만 지금 이 시점에라도 그녀가 내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니 이젠 예전처럼 나를 무시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어본다.


목표한 3주가 지나자, 나는 한결 가벼워졌고 그녀는 입던 바지가 헐렁해졌다고 불평하면서도 제법 밝은 표정으로 바지춤을 접어 옷핀으로 고정시켰다. 오늘도 퇴근 후 그녀는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선다. 오늘은 좋아하는 복싱 수업이라며 어설프게 쉐도우 복싱을 하는 모습을 보니 아직은 그녀의 상상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내가 미안하고도 민망해졌다. 나에게 알맞은 근력과 유연성이 생겨 그녀의 상상대로 나를 움직일 수 있는 날이 언젠간 오겠지. 나도, 그녀도 그날을 기다린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달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