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
수학 문제를 풀고 있던 아들이 엄마를 찾은 지 5분도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또 찾는다. 아이가 풀고 있는 수학 문제를 내가 소리를 내며 읽는다. 갑자기 배꼽 아래 어딘가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며 화딱지가 난다.
지금 이 수학 문제를 아이가 풀고 있는 건지 내가 풀고 있는 건지 헷갈린다.
“아들!!! 문제 몇 번 읽어봤어?”
“......”
“엄마가 문제 속에 답이 있다고 했지. 문제가 이해 안 되면 여러 번 읽어보고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엄마한테 물어봐야지. 봐봐 여기 문제를 잘 읽어봐~”
“난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엄마가 천천히 얘기해주면 되잖아.”
초등 2학년인 아들은 ‘엄마는 뭐 이런 걸로 화를 내냐, 모를 수도 있지, 엄마가 반복해서 얘기해주면 되는 것 아니냐, 이게 뭐 그렇게 화낼 일이냐, 난 이러는 엄마가 이해 안 된다’는 표정과 맑고 순수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본다.
난 마음을 진정시키며 아이 수학 문제를 다시 읽어보지만, ‘어려서 책도 많이 읽어줬는데 어떻게 이 문장이 이해가 안 될 수 있지’하는 배신감마저 든다.
까꿍이 시절부터 회사를 다니면서도 의식적으로 놓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아이에게 책 읽어주기와 영어 노출(영어학습 아님)이었다.
책 읽어주기는 아이가 부모로부터 일찍 독립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책을 좋아해 내 품에서 떨어져 혼자서도 책을 읽는 아이로, 엄마가 없는 시간에도 심심하지 않게 책을 보며 기다려주는 아이로 자라길 바래서였다. 그래서 베이비 이모님과 남편의 도움을 받아 회사 퇴근 후에는 집안일은 최소화하고 아이들에게만 최대한 집중할 수 있도록 세팅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쓰다만 기획안을 보며 아쉬운 마음이 들 때가 많았다.
'좀만 더 하면 마무리할 수 있을 텐데..., 조금만 더 하면 완벽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베이비 이모님 퇴근시간에 맞춰 나 또한 퇴근을 해야 했기에 집에서라도 마무리해보고자 쓰다만 기획안을 프린트해 서둘러 퇴근했었다.
프린트한 기획안을 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보면서 아이가 빨리 내게 떨어져 미스 시절처럼 퇴근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일하고 싶을 때까지 마음껏 일하다 퇴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일에 대해 이런 마음이 드는데 남편은 어떨까 싶어 어느 날 물어봤었다. 남편 또한 내가 야근이라도 하는 날엔 베이비 이모님 퇴근 시간에 맞춰 집에 도착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퇴근시간 전부터 마음이 급해진다고 했다. 주 양육자는 나지만 내가 야근이나 회식으로 인해 퇴근이 늦어지는 날에는 남편이 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남편 또한 육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회사일로 퇴근 시간이 늦어질 때마다 오히려 아이들 양육에 더 힘썼던 것 같다. 아이에게 최대한 사랑을 듬뿍듬뿍 줘서 사춘기 때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 아이로 키우는 것,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키워 일찍 읽기 독립을 시키는 것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책 읽어주기 뿐이 아니었다. 까꿍이 시절부터 영어 소리를 노출해 줬던 것도 영어가 자연스럽게 습득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사교육에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회사 동료들 대부분 아이가 6살이 되면 영어유치원으로 갈아타거나 영어학원을 보낸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영어 소리 노출과 영어책 읽어주기는 계속해야겠다고 다시 마음을 먹었었다.
언어에 자유로운 아이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도 컸지만 솔직히 나의 노후자금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기도 했다.
나의 육아 방식은 어쩌면 아이를 위한 다 긴 보단 나를 위한,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내렸던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초등 2학년이 되어서도 엄마의 눈길과 관심을 받길 원하는 아이를 두고 내 일에만 몰두할 수 없었다.
아이와 함께 수학 문제를 하나 풀고 나서 적잖게 지나간 시간을 보았다. 아이와 함께 수학 문제를 풀며 지나간 내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며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 또한 들었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해본다. 내가 왜 아이가 수학 문제를 풀 때 옆에 같이 있어주기를 선택했는지...
아이가 고학년이 되었을 때 수학에 흥미를 잃어 수업 시간에 엎어져 있길 바라지 않는 마음에서다. 아이가 수학에 소질이 있고 없고는 아이의 성향이라 내가 터치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수학에 흥미를 잃고 일찍 포기하지 않았음 하는 내 마음에서 내 시간의 일부를 아이에게 내어주고 있는 것이다.
생각에 꼬리를 물어보면 결론은 이것 또한 나를 위한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나의 모든 결정은 겉으로는 아이를 위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속내는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다.
내 몸은 아이 옆에 있지만 나는 나만의 혼자 있는 시간을 꿈꾼다.
사랑으로 포장된 내 눈빛을 듬뿍 먹고 아이가 얼른 독립하기를 꿈꾼다.
꿈이 실현되기 위해 나는 아이와 있는 이 시간을 희생의 시간이 아닌 ‘나의 독립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이라 생각하려 한다.
한편으로는 이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질 것 같아 살짝(?) 두렵기도 하지만 ‘엄마’를 찾는 소리가 없는 조용한 나만의 공간에서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며 오늘도 아이의 불음에 흔쾌히 응하는 ‘이기적인 선택’을 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