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두 번이 아니다. 매번 분유 탈 때마다 남편에게 알려줘야 한다. 아기가 더 깰까 봐 큰소리로 말하지도 못한다.
모유수유를 하는 동안 쌍둥이들은 내 양옆에서 함께 잔다. 아기가 자다 젖을 찾으면 몸을 돌려 바로 모유수유를 하기 위함이다. 남편은 아기 한 명을 가운데 두고 나와 떨어져 잔다.
그날도 아들이 먼저 낑낑댄다. 아들의 낑낑대는 소리에 딸이 깰까, 남편이 깰까 싶어 얼른 아이 입에 젖을 물린다. 아들은 배가 고팠는지 꿀떡꿀떡 모유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젖을 빨아댄다. 아들이 한창 모유를 먹고 있는데 등 뒤에서 딸의 낑낑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냥 뒀다간 큰 울음으로 번질 태세다. 나는 젖을 먹고 있는 아들이 깨지 않도록, 낑낑대고 있는 딸이 더 큰소리로 낑낑 대지 않도록, 남편을 적당한(?) 목소리톤으로 부른다. 아이가 백일도 안된 그 시절엔 나도, 남편도 잠이 들어도 긴장된 상태라 나의 적당한 톤의 목소리에 남편이 벌떡 일어난다.
난 이렇게 다급한 순간은 없다는 듯 짧고 굵게 남편에게 요구사항을 전달한다.
“오빠, 분유~!”
눈을 비비며 남편은 나의 요구사항에 매일 동일한 질문을 한다.
“어떻게 타면 돼?”
나는 이 새벽에 우리 대화가 길어져 아기가 더 깨면 어쩌려고 아직도 분유 타는 법을 모를 수 있냐며 한소리 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어제 했던 말을 반복해서 또 한다.
“분유 세 숟갈, 물은 100미리, 너무 뜨거워도 안되고 너무 차가워도 안돼~”
남편은 일어나 대답하며 주방으로 간다.
“알았어.”
내가 부르는 소리에 모른척하지 않고 벌떡 일어 나주는 남편이 고마우면서도 매번 분유 타는 법을 묻는남편이 참 꼴 보기 싫다.
몸을 스스로 간수하지 못하는 아기 둘을 옷 입히기란 쉽지 않다. 아이들 옷만 다 입혀 놓으면 나는 이미 에너지가 방전되어 외출하고 돌아온 상태가 된 듯했다.
그날은 아이들 예방주사를 맞히기 위해 외출하는 날이었다. 딸아이 옷을 입히며 남편에게 아이들 양말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남편은 아이들 양말이 어디에 있냐고 물어본다. 난 남편에게 ‘도대체 몇 번을 알려줘야 하냐고?’ 한소리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내 상태는 딸아이 옷을 입히느라 에너지가 방전된 상태라 다행히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넘어간다.
매번 같은 걸 물어보는 남편이 참 꼴 보기 싫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는 모든 것에 엄마 손이 필요한 쌍둥이 아가들을 초보 엄마인 나도 허둥대며 하나하나 해쳐가며 하느라 정신없는데 어른인 남편은 알아서 해줬음 하는 바람에 남편에게 화가 많이 났던 것 같다.
꼴 보기 싫었던 남편이 메밀국수를 들고 퇴근했다. 점심에 먹었던 메밀국수가 너무 맛있어서 내가 좋아할 것 같아 사 왔다고 했다.
Image by punch_ra from Pixabay
남편이 지하철로 출퇴근하던 시절이었다. 남편은 손에 뮐 들고 다니길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출근할 때는 지갑과 핸드폰만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회사에 들고 가야 할 것이 있는 날은 백팩을 이용했다. 그런 남편이 나에게 맛있는 메밀국수를 먹여보고 싶어 회사 근처 음식점부터 집까지 손수 육수가 흐르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며 지하철을 타고 왔을 모습을 생각하니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다.
꼴 보기 싫음에서 예뻐 보임으로 변하는 순간은 맛있는 것에 인심이 후한 본능적인 나에겐 참 쉬운 일이다.
남편이 사 온 메밀국수는 남편의 말대로 간이 딱 맞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메밀국수였다. 시원한 육수가 그날의 피로를 다 풀어주는 것 같았다. 너무 맛있어서 육수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특히나 그날은 온종일 집안에서 쌍둥이 젖먹이고, 이유식을 시도하느라 허리 펴 하늘 볼 시간도 없이 하루가 다 지나간 날이었다.
둘 다 초보 엄마, 아빠라 허둥대던 시절, 육아에 대해 남편이 충분히 역할을 해주지 못해 실망하던 시절이었다. 남편은 그 시절 물었던 것을 또 묻는 한결같은 남편이었다. 그리고 맛있는 것에 인심이 후해지는 나의 본성을 파악해 맛있는 것을 종종 사다 나르는 한결같은 남편이었다. 쌍둥이들이 커가면서 내 마음이 여유가 생길 때쯤 남편의 꼴 보기 싫음은 남편의 아무런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남편은 변한 것이 없었다. 내 상태만 바뀌었을 뿐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까꿍이를 키우고 있을 남편분이 계시다면 아내를 대신해 이 말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