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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룰루랄라맘 Nov 23. 2020

우리 하루라도 늦게 만나자!

조산의 위험을 모성애로 극복하다.

 뱃속의 아기한테도 모성애가 느껴질까?


난임 시술로 쌍둥이 임신 후 안정권에 접어들자 일반 산부인과로 옮겨져 진료를 받게 되었다. 일반 산부인과로 옮겨지니 진료 주기도 늘어나고, 예약을 잡기도 수월하고, 대기시간도 짧아졌다.

난임 시술을 받는 예비 산모들은 임신 시도부터 태아가 자궁 속에 안착될 때까지 일주일에 한 번, 많게는 일주일에 2~3번은 병원을 방문해야 한다. 2주에 한 번만 진료를 받아도 된다는 소식은 그동안 많은 연차를 소진한 내게 희소식이 분명했다.  


28주가 돼가는 무렵 정기검진을 받기 위해 진료 시간에 맞춰 병원에서 만나자고 남편과 약속을 잡았다.  그날은 왠지 남편과 함께 가고 싶었다.


28주 조산위기


늘 하던 순서대로 초음파 검사 후 남편과 함께 담당 의사 진료실로 들어갔다. 담당 의사는 초음파 검사 결과를 보자 자궁 길이가 많이 짧아졌다고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자궁 길이가 짧아졌다는 것은 조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의미다. 만약 조산을 하게 되면 아기는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하고, 해당 병원에서 처치 못할 위급사항 발생 시 아기는 다른 병원으로 옮겨질 수 있다고도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정상적인 출산까지 아직 2달이나 남아 있었고, 회사 업무 정리도 못한 채 반차를 내고 나온 상태였다. 나는 진료실에서 나와 바로 팀장님께 전화를 걸어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고맙게도 업무 걱정은 하지 말라는 답변을 받아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하지만 입원기간이 얼마나 될지 모를 일이었다.


남편은 아직도 담당 의사와 대화 중이었다. 진료실에서 나온 남편은 병원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위급사항 발생 시 현재 다니고 있는 병원은 인큐베이터가 모자를 수도 있고 추가 응급처치가 필요할 경우 병원을 어차피 옮겨야 한다고 했다. 차라리 지금 병원을 옮겨 출산 때까지 진료를 받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었다.


결국 28주에 우리는 서울 아산 병원으로 옮겨 진료를 받게 되었다. 담당의사의 추천으로 다음날 바로 아산 병원 산부인과에 입원할 수 있었다.   


아산병원 입원

다음날 아침 남편과 나는 전날 미리 간단히 쌓아 놓은 짐을 챙겨 아산병원 산부인과로 갔다. 아산병원에서는  이미 내 상황을 전달받은 상태였다. 신분확인과 기본 검사를 받은 후 나는 침대에 눕혀졌다. 의료진들과 남편은 뭔가 부산스럽게 움직였고 바로 팔뚝에 링거 주사가 꽂아졌다. 자궁 수축을 지연시키는 약을 투약한다고 했다.


이미 자궁수축이 진행되고 있다고 응급 의료진이 말했다. 자궁 길이도 짧아진 상태고 자궁도 2cm 정도 열린 상태라고 했다. 지금 자궁수축을 잡지 못하면 바로 출산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언제 아기가 나올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아기는 아직 28주라 폐도 형성되기 전이었다. 조산을 하게 되면 인큐베이터에 바로 들어가야 했고, 엄마 없이 홀로 있어야 할 아기를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내 품에서 하루라도 더 있길 바랄 뿐이었다. 다행히도 자궁수축 억제제가 효과를 발휘해 가진통이 잦아들었다.


고위험 임산부 집중치료실


응급조치가 끝나자마자 다른 병실로 옮겨졌다. 창문도, TV도, 시계도 없는 방이었다. 6명의 산모가 있고 화장실이 딸린 병실이었다.


그곳은 분만실 옆에 위치한 고위험 임산부 집중치료실이었다.


집중관리실에 있는 산모들은 언제든 출산이 가능한 산모로 위급사항 발생 시 바로 옆에 있는 분만실로 이동하여 출산을 할 수 있었다. 자연 분만을 하고 있는 산모들의 비명소리가 생생하게 들릴 정도였다.  


집중치료실에 있는 동안 뱃속의 아기를 하루라도 더 품고 있기 위해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 외엔 침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세수도, 머리 감기도 신체에 무리를 주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말아야 했다. 그렇게 2달 동안 침대와 한 몸이 되어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 외엔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이가 건강하게 하루라도 더 뱃속에서 있을 수 있다면 좁은 침대 생활쯤이야 견딜 수 있었다.


자궁수축 억제제는 3일에 한 번씩 갈아줘야 했고, 그때마다 팔뚝에 꽂혀있던 바늘도 바꿔줘야 했다. 양쪽 팔을 바꿔가며 링거 주사 바늘이 꽂혔다. 시험관 시술 시 직접 배에 주사를 놓아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식겁했던 때가 생각났다. 이제는 아이를 위해 주사 바늘쯤이야 하나도 겁나지 않는 용감한 예비 엄마로 하루 만에 변해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랑 하루만 더 있다 만나자’고 배속의 아기에게 말해주었다.


어느 날 침대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데 커튼 너머로 나지막한 산모와 담당의사의 대화가 들려왔다. 심각한 대화가 오가더니 갑자기 산모의 울음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기를 출산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의 말을 듣자 산모는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뱃속의 아기가 30개월도 되지 않아 출산 후 바로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했다. 병실 안은 적막 해졌고, 산모의 울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방에 있던 모든 산모들이 나처럼 숨죽이고 있었던 것 같다. 밤낮으로 간호해주시던 고모님께서는 뱃속의 아기를 생각해 먹던 밥을 마저 먹으라고 손짓하셨다. 커튼 너머로 들려오는 옆 산모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배고파할 뱃속의 아기를 위해 최대한 조용히 밥을 꼭꼭 씹어 넘겼다.  


집중 치료실에 있던 산모 중 한 명은 출산이 임박하여 인큐베이터 자리가 나오지 않아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나 또한 출산이 진행될 때 인큐베이터가 없으면 다른 병원으로 옮겨질 수 있다고 안내를 받은 상태였다. 나보다 먼저 입원했던 산모들이 하나둘 출산을 하게 되고, 그 빈자리는 비워지기가 무섭게 바로 다른 산모들로 채워졌다. 시간이 갈수록 내 양쪽 팔뚝은 주삿바늘 자국으로 가득 차게 되었고, 그나마 주사 바늘 자국이 적게 있는 곳을 찾아 주사를 맞아야만 했다. 주사를 맞는 것은 내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갔다. 

 

33주 초음파로 보게 된 아기들

33주가 넘어서야 아이가 어떻게 크고 있는지 초음파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뱃속의 아기에게 자극을 최대한 주지 않기 위해 입체 초음파 촬영이나 막달 사진 찍기는 내게 사치였다. 초음파 실로 이동은 휠체어를 타고 갔다. 복도를 지나며 입원 후 처음으로 하늘을 보게 되었다. 여름 하늘이 어찌나 맑고 화창한지 고모님께 잠깐만 밖에 나갔다 오자고 졸랐다. 정수리에 꽂히는 뜨거운 햇살이 짜릿했다. 숨 쉴 때마다 코로 들어오는 습한 공기도 감사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처럼 숨을 크게 몇 번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초음파 실에 도착해 그동안 보지 못했던 뱃속의 아기들을 보니 팔, 다리, 눈, 코, 입, 귀, 손가락, 발가락까지 모두 만들어져 있었다. 책에서만 보아왔던 건강한 태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집중치료실에 있는 동안에는 아기의 주차별 성장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위험한 고비를 잘 넘기고 건강하게 잘 자라준 아기들이 고마웠다.   


34주 일반병실로 이동

쌍둥이인 경우 34주는 진통이 오면 출산을 해도 되는 시기였다. 이제 고위험 임산부 집중치료실에 있지 않아도 됐고, 자궁수축 억제제도 맞지 않아도 됐다. 맘이 편안해져서 그런지 이제야 정말 임산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궁수축 억제제를 끊고 바로 진통이 올 수 있기에 일반 병실에서 일주일간 입원을 권유받았다. 일반 병실로 옮겨진다는 말에 제일 먼저 “일반병실은 창문이 있나요?”를 물어봤다. 당연히 창문이 있다고 했고, 특별히 창가 옆으로 배치해 준다고 말씀도 해주셨다. 이젠 하늘을 맘껏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까지 설렜다. 2달간 하늘의 변화를 느껴보지 못하니 자연이 주는 당연한 것들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일주일 동안 일반병실에 있으면서 면회도 자유로워졌다. 그동안 먹고 싶었던 음식들을 병문안을 오는 가족들과 남편을 통해 조달해 먹을 수 있는 것도 큰 기쁨이었다. 두 달 전 조산기로 입원했던 때와 너무 대조되는 생활이었다. 쌍둥이 임신의 막달은 단태아 막달보다 2주가 빠른 38주다. 36주를 꽉 채운 두 달간의 병원 생활은 38주가 되는 날 수술 예약을 잡고 끝이 났다.




하루만 더 늦게 만나자고 뱃속의 아기와 매일 대화했다. 양쪽 팔이 주삿바늘 자국으로 가득 찼어도, 머리를 제때 감을 수 없어도 두 달간의 좁은 침대 생활은 슬프지 않았다. 아이만 건강하게 지킬 수 있다면 더한 불편함도 감수할 수 있었다.  

누군가 "뱃속의 아기에게도 모성애를 느낄 수 있냐?"라고 묻는다면 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렇다" 대답할 것이다.

엄마는 강하다고 했던가. 어렵게 내게 온 쌍둥이를 만나기 위해 난 엄마가 되기 전부터 난 강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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