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에 '**학교'에 등록할 즈음, 엄마라는 역할이 너무 지긋지긋해서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눈만 뜨면 식구들의 밥과 귀가시간을 챙기고 있는 내가 한심스러워 이만큼 했으면 됐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 것인가 싶었고 다시 가슴을 뛰게 할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고 싶었다. 수업 외에 다른 책들도 찾아 읽고 미술사 강의와 글쓰기 모임도 계속해오고 있었지만 마음속에서는 늘 한 가지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후회하지 않을까?’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들으면 답을 손에 넣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가 며칠 지나다 보면 공부를 하나 안 하나 이렇게 살다가 나이 들어 죽게 되는 건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헛헛한 마음에 지인들을 만나도 늘 자식과 노후에 대한 뻔한 주제로 얘기를 나누다 돌아왔고 만남의 결론은 누군가를 시기하거나 안도하거나 할 뿐이었다. 사람은 이어져야 한다지만 왜 누군가를 만나고 오면 마음이 더 공허해지고 삶이 더 허무한지 알 수 없었다. 가족도 공부도 인간관계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가.’ 내가 해온 공부는 나의 일상을 변화시키지 못했고 여전히 나는 미로 속을 헤매고 있는 기분이었다.
다 이루어지면 행복할 거라는 착각
얼마 전에 오랜만에 지인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그분은 남편의 월급만으로 정말 알뜰하게 자식들을 키우며 평범하게 살아오셨는데, 몇 년 전 남편이 퇴직을 하고 지방으로 옮겨가며 받은 회사의 스톡옵션이 상장되면서 평생 써도 다쓸 수 없을 만큼 큰돈을 벌었다. 당시 자녀들에게 증여해준 주식도 몇 배로 올라 그야말로 가장 흔한 게 돈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그 사이 살던 집도 바뀌었고, 그 전엔 있는지도 몰랐던 명품들도 자주 사들였다. 돈 벌기 전에 만나던 사람들과는 자연스레 멀어지고 남편과 골프를 시작하며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기도 했다. 그분의 가장 큰 스트레스였던 시골에 계신 시부모님도 구순을 앞두고 차례로 병사하셨다는 소식까지 다른 지인을 통해서 간간이 듣곤 하던 그분의 상황은 ‘인생 한방’이라는 단어로 압축됐다. 그런데 오랜만의 통화가 길어지면서 듣게 된 그 속내는 은근히 피어올랐던 질투심을 사라지게 했다. 대박이 터지고 한 이년 간은 원 없이 돈을 쓰며 살았는데 최근 들어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는데 오늘은 또 뭘 하면서 하루를 보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이렇게 누운 채로 사라지고 싶다는 것이다. 또 시부모님이 다 돌아가셨어도 남편만 보면 자신에게 모든 짐을 지웠던 시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고, 늘어난 재산을 관리하는 스트레스 때문에 밤에는 신경안정제를 먹고서야 잠을 이룬다고 했다.
지인의 솔직하고 우울한 토로를 들으며 어이없게도 상당히 공감이 되었다. 나는 대박을 맞지도 않았고, 모셔야 할 부모님도 계시고 자식들의 독립도 한참 멀었는데 말이다. 아마도 머릿속에 그려놓은 ‘행복’이라는 기준에 모든 것이 맞아떨어져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내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은 늘 남과의 비교에서 왔다. 크고 작은 불만이 생길 때마다 나는 무언가를 계획하고 남을 바꾸려고 애써왔다. 그게 열심히 사는 거라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과연 내가 바라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면 나는 편안한 사람이 될까.
손에 잡히는 질문으로
쉽게 불안해지고 걱정이 많았던 나는 오랫동안 방광염을 앓아왔는데, 증상이 생겼을 때 항생제만 복용하면 금세 잦아들었기 때문에, 마음을 비움으로써 몸의 조화를 이루어야 근본적인 치료가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우리 몸이 건강하려면 '수승화강'이 잘 이루어져야 한다는 구절이 자주 나온다.
신장의 물기운은 올라가고 심장의 불기운은 아래로 내려가야 음기운과 양기운의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원리인데, 내경 편을 읽어보니 '시대의 병'이 되어버린 공황장애와 조울증도 '수승화강'이 안 되는 몸과도 관련이 있었다.
옛사람들은 잡념이 없고 욕심이 적어서 정신이 안정되었고, 과도한 일로 몸을 피로하게 하지 않았다. 어떤 음식도 달게 먹고 어떤 옷도 편안하게 입으며 지위가 높건 낮건 서로 부러워하지 않는 소박한 사람들이었다. (『낭송 동의보감 내경 편』 3-2 마음을 비워라)
<동의보감>을 읽으며 이 구절을 발견했을 때, 내가 원하는 행복한 삶에 대한 답을 얻은 것 같아 오랫동안 이 페이지에 눈길이 머물렀다. 어쩌면 이젠 좀 다르게 살 수 있을것 같기도 했다가 또 도루묵이구나 싶기도 했던 올 한 해가 끝나는 지금, 다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려본다.
들뜬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여행해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 탈출을 꿈꾸는 사람처럼,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망으로 새로운 공부를 찾아다녔지만 나는 어떤 공부를 해도 똑같은 질문 안에서 맴돌았었다. 내가 찾던 다른 삶이란, 손에 잡히지 않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을 다른 시선과 다른 몸으로 살아내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공부의 쓸모는 그 일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서 ‘어떤 하루를 보낼 것인가’라는 질문에 잘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모자라거나 넘치는 대로 그 질문을 품고 보낸 하루하루가 모이면 언젠가는 공부로 바뀐 일상을 목격하게 되는 날도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