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씨 Mar 09. 2023

수도원을 떠나며 - 이어지는 이야기들

실망도 희망도 하지 않고 사는 맛에 대하여

수도원을 떠나는 날, 아침미사 후에 신부님과 면담 시간을 가졌다. 신부님은 수도원에서 본 남자들 중 가장 키가 크고 연세가 많은 분이 아닐까 싶었다. 긴 수도사복을 입고 성킁성큼 걸어오시는 모습에 살짝 긴장되었다.

원래는 고해성사를 신청했었는데 신부님께서 먼저 면담을 원하는지 성사를 원하는지 물으시길래 면담을 원한다고 말씀드렸다. 신부님은 잘 웃으시고 말씀도 잘하셨다. 스물두 살에 종신서원을 하셨다는 김구인 요한 보스코 신부님은 올해로 수도원에 들어오신 지 60년이 된다고 하셨다. 그 사이  이곳 왜관 수도원의 대원장(라틴어로 '아빠스'라고 부르는데 실제 뜻도 '아빠'라고 한다)을 10년이나 지내셨다.


나는 그 자리에서 특별히 고해를 하고 싶다기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 가지 일을 죽 하며 살아가는 일에 관해 여쭤보고 싶었다. 내가 오십에 접어들며 '내 일'이 없다는 사실에 허무함을 느끼고 거기서부터 한참 헤매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신부님은 이야기를 들으시고 내가 꼭 '앉을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나비'같다고 하셨다. 자기 일을 하고 싶은 건 당연하고 원하는 것을 하면 되지만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저버리면 안 된다는 말이 와닿았다.  엄마로 살아온 시간을 저버리고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겠다는 듯이 딸들과 부딪혔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혼란, 억울함, 부끄러움, 후회 같은 감정이 뒤엉켜있던 시간들. 아마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신부님이 말씀이 그저 '분수를 알아라'는 말 정도로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살아온 시간이 아무리 후회가 깊다 해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스스로 선택한 길에 대한 그림자일 뿐이다. 어느 길을 선택했든 그림자는 낯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일은 예외 없이 다 끝이 있고 거기서 느끼는 허무함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지만 '부활'이 있기 때문에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는 말씀이 이어졌다.  오늘 면담에서 처음으로 '부활'이라는 말이 나왔다. 어쩌면 신부님과 나누는 이야기에서 '부활'이라는 단어는 가장 피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그건 성경 속 예수님의 일이고 나는 숨 쉬고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말을 굳이 내 입으로 하는 것을 피하고 싶기도 했다. 내가 정말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면, 몇 킬로 걷지도 못하고 금방 바닥나는 체력과 하얘진 머리카락, 조금 높은 간수치를 가지고 이렇게  우울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나는 '부활'의 의미를 설명하시는 신부님의 목소리에 그다지 귀 기울이지는 않았지만 혹시 내가 잡을 만한 지푸라기라도 걸리면 놓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은 가지고 있었다.

피정의 집 복도와 쉼터

어떻게 하다 보니 이야기는 이리저리 가지를 쳐서 동성결혼을 바라보는 시각과 애완견을 키우는 것에 대한 견해, 친구를 비롯한 인간관계까지 폭넓게 이어졌다.

신부님은 결혼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람들끼리의 결합이라는 데 대한 철학이 확고하셔서 동성 간의 결혼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셨다. 난 동성애를 특별히 옹호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데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 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사랑하는 것과 결혼은 다른 문제라고 단호히 선을 그으셨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데 어떻게 부부가 될 수 있냐며 아이를 딴 데서 데려다 키 올 거냐고 물으셨는데 나는 순간 수많은 입양 가정이 떠올랐다. 또 집안에서 자식처럼 애완견을 키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하셨다.  동성결혼도 애완견 문제도 약 이십 년 전에 내가 가졌던 생각이었다. 수천 년 동안 가톨릭 문화권인 유럽에서조차 신자가 급감하는 게 어쩌면 종교가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세계에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었다. 먹고사는 데 버티는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종교를 지킬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신부님은 9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먹고살 길이 막막해져서 성당에 드나들게 되었다고 하셨다. 전쟁이 끝나고 모두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릴 때 부모 없는 아이들을 보듬어주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었다면 우리 시대에 종교가 돌보아야 할 사람들 중에는 차별로 고통받는 동성애자들도 있을 수 있다. 신부님은 요즘 애완견을 키우는 가정이 늘어나는 이유를 잘 모르시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클수록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이 점점 어려워져서 강아지라도 매개가 되어야 서로 한마디라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친구는 몇 달 전에 강아지를 입양하고 나서 사람 사는 집이 된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한다. 엄마도 아빠도 자식들도 각자 외로운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기다려주는 존재가 그리워 나를 하늘처럼 쳐다보는 강아지와 눈을 맞추는 것이다.


나는 사실 이쯤에서 면담을 마치고 싶었다. 수도원에 와서까지 이런 이야기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신부님은 '메러디스 빅토리아 호'라는 배를 아느냐고 물으셨다.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 공지영의 '수도원 일기 2'를 읽던 중 '왜관수도원'편의 이야기가 인상 깊어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던 차였다. 책에서 읽은 내용과 신부님의 말씀을 모아 정리해 보면 이렇다.


 6.25 전쟁이 났던 1950년 겨울에 함경남도 흥남부두에서 정원 60명의 배에 14,000명의 피난민을 태워 거제에 도착한 미국 화물선의 이름이 '메러디스 빅토리아 호'였고 당시 배에 실었던 무기를 버리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싣기로 결정을 내렸던 사람이 '레너드 라루' 선장이었다. 그는 2년 뒤 본국으로 돌아가 미국 뉴저지주의 '뉴튼 베네딕트 수도원'에 들어가 '마리너스'  수사가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흘러 2001년 문득 그가 있던 뉴튼 수도원 측에서 왜관수도원에 재건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때 폐쇄위기에 처한 뉴튼수도원에 수도자들을 파견해 회생시킨 분이 바로 앞에 계시는 김구인 요한 보스코 신부님이었다. 당시 왜관 수도원 대원장이셨던 신부님은, 87세의 마리너스 수사님이 뉴튼 수도원에 파견된 한국인 수사들을 보고 감격하셨으며 이틀 뒤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마리너스 수사님과 김구인 신부님의 일생이 동시에 내 마음으로 들어왔다.


 한두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보수'라는 말이 나오면 시커먼 속을 감추려는 의도를 안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가끔 그 말의 본래 뜻에 비추어 나를 돌아볼 때가 있다.  '보수', 옛 것을 지킨다는 건 오랜 세월의 파도를 헤쳐 나온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이거나 스스로에 대한 긍지 같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나 역시 '보수주의자'이구나 싶기도 했다.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분별할 줄 안다는 것과 옳고 그름을 심판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많은 사람들과 상처받고 상처 주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신부님은 면담을 끝내시면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내가 로비에서 커피를 가져오는 사이 신부님은 다시 들어오셔서 테이블 위에 책을 놓고 무언가 적고 계셨다.


Rosaria님.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서 개인피정을 한 기념으로 이 책을 드립니다. 생일 기념도!!!
2023. 3.*
김 ○○  신부


「우리 믿음이 든든한 바위 같게 하소서」

사제서품 60주년을 기념하여 묶은 신부님의 강론집이었다.


한 자리에서 잘 견딜 줄 알고 잘 일어서서 어디든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졌다. 쉰세 번째 생일을 맞아 떠난 2박 3일 피정을 마치고 오늘은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왜관수도원 문을 나섰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실성당 나들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