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우연히 한 모임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과 한 달에 한번 모임을 갖자고 약속했다. 모임의 멤버들은 20대부터 50대까지 거의 열 살 터울의 나이 차가 있었고, 직업도, 성격도 다 달랐지만 글쓰기가 자신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준다고 생각하는 점만은 일치했다.
앞서 두 차례의 모임에서 우리는 일주일 당 한편씩, 총 4편의 글을 써오기로 하고 이렇게 꼬박꼬박 글을 써서 1년 치를 모아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막상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글쓰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을 써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고, 글을 쓰지 않아도 시간은 잘만 흘러갔다. 글을 쓰고 나면 딱 그 글을 쓰기 위해 애쓴 만큼 더 나은 내가 되어있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펴면, 세상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쓴 수많은 글들이 있는데 굳이 나까지 써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문장이라도 쓰려면 이런저런 생각들로 엉클어져 있는 나와 대화해야 했고, 설득해야 했고, 그것을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써오지 않은 글 한편 당 5천 원의 벌금을 내기로 한 것 외에는 어떤 제약도 없었다. 우리의 마감은 꼭 지키자는 약속 하나뿐이었다.
무엇을 써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왜 써야 하나 하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왔고, 쓰지 않은 채로 모임에 나가 벌금을 내는 나를 상상하니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았다. 커피 한잔을 내려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노트북 앞에 다시 앉았다. 이번 달 주제였던 <나의 인생 책>으로 쓰려고 찜해둔 책과 읽다 말고 책상 한구석에 올려둔 책들을 뒤적였다.
'내 인생의 책'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기로 했을 때 떠올랐던 책은 조셉 캠벨의 <신화와 인생>, 로버트 존슨의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였다. 두 권 다 진정한 자기와 만나는 삶을 살아가도록, ego가 아닌 self로 살아가도록 응원하고 독려해주는 책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 두 권의 책을 다시 읽어보아도 한 문장도 쓰기 어려웠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았다. 내가 이 책들을 읽은 것은 7,8년 전인데, 그때 나는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느라 20대의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이었는지조차 가물가물했었다. 언젠가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나면 내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글도 쓰고 책도 읽고 또 취업도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세뇌하듯이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그 길고도 어려운 과정을 지나면서 '엄마가 되기 이전의 나'를 보전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자의식으로 가득한 젊은 시절의 나인 채로는 다른 생명을 낳고 보살피는 일을 해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20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이제야 다시 '나'와 마주했는데 이전의 '나'는 온데간데없고 주름과 흰머리가 내려앉은 폐경을 앞둔 중년 부인이 서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지간한 일들을 다 겪은 그녀는, 더 이상 배우고 싶은 것도 없어 보였고, 누구의 눈치도 보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길어진 노년기 리스크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하는 새로운 숙제를 앞두고 몹시도 지쳐 보이기만 했다.
그녀 속에 있는 또 다른 내가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제야말로 너를 위한 시간이 왔다고,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계획들을 꺼내 하나씩 이루어보자고. 하지만 식탁 의자에 앉아 유튜브를 시청하는 그녀를 책상의 노트북 앞으로 움직이게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녀는 믿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말을. 이제는 너를 위해 살아도 된다는 말을.
무의식은 자아가 한계에 부딪치도록 하기 위해 희망이라곤 없어 보이는 갈등을 바란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결정을 하든 잘못될 것이고 어느 길을 택해도 실패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자아는 항상 선택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착각으로 행동하는데, 그렇다고 "아! 그렇다면 나는 그저 모든 걸 포기하고 아무 결정도 내리지 말아야지. 시간을 끌면서 꾸물거릴 거야"라고 말한다면, 이 역시 자아의 우월감으로 행동하는 것만큼 잘못된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마땅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로버트 존슨 / 에코의 서재)
무언가를 사랑해야 좋은 글이 나오더라고요. 대상을 향한 뜨거운 사랑에서 분명 맑고 환한 에너지가 나와요. 누군가를 비난하고 싫어하는 감정에서 '강한 에너지'가 나올 수는 있지만 '긍정적이고 환한 에너지'는 나오지 않지요. 적과 싸우는 투사의 이야기를 쓸 때도 초점은 적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적과 싸우는 투사에 대한 사랑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끝까지 쓰는 용기> (정여울, 김영사)
짧은 문장이지만 책상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게 만들었던 구절을 다시 읽어보면 거기에는 어느샌가 내게서 빠져나가버린 사랑과 열정이 있었다. 자꾸만 움츠려 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에 서게 만드는 나를 다시 돌아 세우게 하는 힘이 있었다.
엄마가 아닌 나를 위해 살지 못했던 시간 동안 내가 해낸 일들을 돌아본다. 내가 살아온 20여 년의 시간은 두 갈래 길을 가지 못한 나의 한계였을 뿐 그 길은 분명 내가 선택한 길이고 틀린 길도 아니었다. 답 없이 허전한 이 마음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지나간 날에 대한 후회보다 나이 듦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자리하고 있을 뿐.
살아보지 않은 날에 대한 두려움은 20대나 50대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앞으로 내게 다가올 일들이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씨앗이 되어 자라난 결과일 것이다. 다가올 날들은 막연하지만 매일 주어지는 하루는 살아볼 만하다. 화분에 물을 주듯이 그날 치 시간과 인연을 정성껏 보살피며 살아보자고 쉰 살의 내게 말을 건넨다.